시(詩)/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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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석문(石門)시(詩)/조지훈 2013. 11. 19. 21:08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 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石壁欄干)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리울 때까지는, 천 년(千年)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희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 빛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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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병(病)에게시(詩)/조지훈 2013. 11. 19. 21:06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에게 휴식을 권하고 생(生)의 외경(畏敬)을 가르치네. 그러나 자네가 내 귀에 속삭이는 것은 마냥 허무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자네의 그 나직하고 무거운 음성을 듣는 것이 더없이 흐뭇하네. 내 뜨거운 이마를 짚어 주는 자네의 손은 내 손보다 뜨겁네. 자네 여윈 이마의 주름살은 내 이마보다도 눈물겨웁네. 나는 자네에게서 젊은 날의 초췌한 내 모습을 보고 좀더 성실하게, 성실하게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