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조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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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산상의 노래시(詩)/조지훈 2013. 11. 19. 21:26
높으디 높은 산마루 낡은 고목에 못박힌 듯 기대여 내 홀로 긴 밤을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 아아 이 아침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꽃다운 하늘이거니 내 영혼의 촛불로 어둠 속에 나래 떨던 샛별아 숨으라 환히 트이는 이마 우 떠오르는 햇살은 시월 상달의 꿈과 같고나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오래 잊었던 피리의 가락을 더듬노니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사슴과 토끼는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사양하라. 여기 높으디 높은 산마루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 내 홀로 서서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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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영상(影像)시(詩)/조지훈 2013. 11. 19. 21:22
이 어둔 밤을 나의 창가에 가만히 붙어 서서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은 누군가 아무 말이 없이 다만 가슴을 찌르는 두 눈초리만으로 나를 지키는 사람은 누군가 만상이 깨어 있는 칠흑의 밤, 감출 수 없는 나의 비밀들이 파란 인광으로 깜박이는데 내 불안에 질리워 땀 흘리는 수많은 밤을 종시 창가에 붙어 서서 지켜보고만 있는 사람 아 누군가 이렇게 밤마다 나를 지키다가도 내 스스로 죄의 사념을 모조리 살육하는 새벽에 가슴 열어제치듯 창문을 열면 그때사 저 박명의 어둠 속을 쓸쓸히 사라지는 그 사람은 누군가 (그림 : 오견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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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여운 (餘韻)시(詩)/조지훈 2013. 11. 19. 21:20
물에서 갓나온 여인이 옷 입기 전 한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탑이여! 온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검푸른 숲 그림자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채는 부드러운 어깨 위에 출렁인다 희디흰 얼굴이 그리워서 조용히 옆으로 다가서면 수지움에 놀란 그는 흠칫 돌아서서 먼뎃산을 본다 재빨리 구름을 빠져나온 달이 그 얼굴을 엿보았을까 어디서 보아도 돌아선 모습일 뿐 영원히 보이지 않는 탑이여! 바로 그때였다 그는 남갑사 한 필을 허공에 펼쳐 그냥 온몸에 휘감은 채로 숲속을 향하여 조용히 걸어가고 있었다 한 층 한 층 발돋움하며 나는 걸어가는 여인의 그 검푸른 머리로 너머로 기우는 보름달을 보고 있었다 아련한 몸매에는 바람 소리가 잔잔한 물살처럼 감기고 있었다 (그림 : 박연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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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맹세시(詩)/조지훈 2013. 11. 19. 21:18
만년을 싸늘한 바위를 안고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하리야 어둠에 창백한 꽃송이마다 깨물어 피 터진 입을 맞추어 마지막 한 방울 피마저 불어놓고 해 돋는 아침에 죽어 가리야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모든 것 다 잃고라도 흰 뼈가 되는 먼 훗날까지 그 뼈가 부활하여 다시 죽을 날까지 거룩한 일월의 눈부신 모습 임의 손길 앞에 나는 울어라 마음 가난하거니 임을 위해서 내 무슨 자랑과 선물을 지니랴 의로운 사람들이 피 흘린 곳에 솟아오른 대나무로 만든 피리뿐 흐느끼는 이 피리의 아픈 가락이 구천에 사무침을 임은 듣는가 미워하는 것 미워하는 모든 것 다 잊고라도 붉은 마음이 숯이 되는 날까지 그 숯이 되살아 다시 재 될 때까지 못 잊힐 모습을 어이하리야 거룩한 이름 부르며 나는 울어라 (그림 : 신동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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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 꿈 이야기시(詩)/조지훈 2013. 11. 19. 21:15
문(門)을 열고 들어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마을이 온통 해바라기 꽃밭이었다. 그 훤출한 줄기마다 맷방석만한 꽃숭어리가 돌고 해바라기 숲 속에선 갑자기 수천 마리의 낮닭이 깃을 치며 울었다. 파아란 바다가 보이는 산 모롱잇길로 꽃 상여가 하나 조용히 흔들리며 가고 있었다. 바다 위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오색(五色) 비단으로 돛폭을 달고 뱃머리에는 큰 북이 달려 있었다. 수염 흰 노인이 한 분 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불었다. 꽃상여는 작은 배에 실렸다. 그 배가 떠나자 바다 위에는 갑자기 어둠이 오고 별빛만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 (그림 : 황제성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