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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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저녁 등명(燈明)시(詩)/이문재 2013. 12. 25. 12:19
저녁 등명에 가면 불 들어 온다 7번 국도 초입, 동해 초입 낮에는 눈부셔 눈뜨지 않는 해안 없는 듯 엎드려 있는 마을, 燈明 집어등 점점이 수평선 새로 그을 즈음 마을은 한낮에 고인 빛을 모아 저마다 하나씩 등을 단다 모든 집이 연등으로 살아나 연등 속에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는 심지가 된다 어둠이 내려야 등명이 되는 등명리 땅에 다 와서 스스로 깊이를 잃는 동해도 등명 앞에서는 순해진다 마음 캄캄하던 사람들도 저녁 등명에 가면 불이 켜진다 밤바다, 집어등 사이로 새파란 길이 보인다 (그림 : 김성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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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등명 (燈明)시(詩)/이문재 2013. 12. 25. 12:19
등명 가서 등명 낙가사 가서 심지 하나로 남고 싶었다 심지의 힘으로 맑아져 작은 등명이고 싶었다 어떤 지극함이 찾지 않아 하얀 심지로 오래 있어도 좋았다 등명리에 밤이 오고 바다의 천장에 내걸린 수백 촉 집어등 불빛에 가려진 깊은 밤그늘이어도 좋았다 질문을 만들지 못해 다 미쳐가는 어떤 간절함이 찾아왔다가 등명을 핑계대며 발길질을 해도 좋았다 심지 하나로 꼿꼿해지면서 알았다 불이 붙는 순간 죽음도 함께 시작된다는 것을 좋았다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 그리워 죽을 지경이라는 어떤 그리움이 찾아와 오래된 심지에 불을 당길 터 (그림 : 이성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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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파꽃시(詩)/이문재 2013. 12. 25. 12:18
저런 ‘속없는’ 양념 같으니라구.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그 속을 어따가 비웠을까. 가만, 저 양반 우습게 볼 일 아니네. 속은 없어도 맵기는 이렇게 맵고, 뼈 한 마디 없어도 꼿꼿하기 이를 데 없네. 세상에 얕보고 허투루 볼 것 없음을 저이로 하여 다시금 알겠네. 조상 대대로 ‘음심’과 ‘분노’를 일으킨다 하여 절 밖에 쫓긴 물건(五辛菜)이었건만, 속 비우고 맘 비워서 저 홀로 사원이 되었구나. 닝닝닝-, 봄날 파밭 한 뙈기 날마다 초파일이로구나. 대파대사, 쪽파보살의 ‘무심법’을 들으러 저 속 빈 사원을 찾는 벌과 풍뎅이 신도가 무릇 기하이뇨. (그림 : 조경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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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물의 결가부좌시(詩)/이문재 2013. 12. 25. 12:18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 개의 달이 빠져 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 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 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있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