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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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연금술시(詩)/이문재 2017. 2. 10. 23:06
배추는 굵은 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지지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 빚고, 졸이고, 튀기고, 뜨고, 뽑고, 어르고 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 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 쑥 뽑아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먹고 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 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 이른 봄 두릅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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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화전시(詩)/이문재 2016. 3. 11. 13:59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와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 질러라, 불 (그림 : 김선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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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해남길, 저녁시(詩)/이문재 2016. 3. 10. 00:05
먼저 그대가 땅끝에 가자 했다 가면, 저녁은 더 어둔 저녁을 기다리고 바다는 인조견 잘 다려놓은 것으로 넓으리라고 거기, 늦은 항구 찾는 선박 두엇 있어 지나간 불륜처럼 인조견을 가늘게 찢으리라고 땅끝까지 그대, 그래서인지 내려가자 하였다 그대는 여기가 땅끝이라 한다, 저녁놀빛 물려놓은 바다의 남녘은 은도금 두꺼운 수면 위로 왼갖 소리들을 또르르 또르르 굴러다니게 한다, 발 아래 뱃소리 가르릉거리고 먹빛 앞섬들 따끔따끔 불을 켜대고, 이름 부르듯 먼 데 이름을 부르듯 뒷산 숲 뻐꾸기 운다 그대 옆의 나는 이 저녁의 끄트머리가 망연하고 또 자실해진다, 그래, 모든 끝이 이토록 자명하다면야, 끝의 모든 것이 이 땅의 끝 벼랑에서처럼 단순한 투신이라면야 나는 이마를 돌려 동쪽 하늘이나 바라다 보는데 실루엣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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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봄이 고인다시(詩)/이문재 2016. 3. 4. 16:05
봄이 고이더라 공중에도 고이더라 바닥없는 곳에도 고이더라 봄이 고여서 산에 들에 물이 오르더라 풀과 나무에 연초록 연초록이 번지더라 봄은 고여서 너럭바위도 잔뿌리를 내리더라 낮게 갠 하늘 한 걸음 더 내려와 아지랑이 훌훌 빨아들이더라 천지간이 더워지더라 봄이 고이고 꽃들이 문을 열어젖히더라 진짜 만개는 꽃이 문 열기 직전이더라 벌 나비 윙윙 벌떼처럼 날아들더라 이것도 영락없는 줄탁 줄탁이러니 눈을 감아도 눈이 시더라 눈이 시더라 줄탁동기(啐啄同機) : 줄탁동기는 깨우침과 관련된 공안이다. 알 속에서 자란 병아리는 부리로 껍질 안쪽을 쪼아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줄'은 바로 병아리가 알껍질을 깨기 위하여 쪼는 것을 가리킨다. 어미닭은 품고 있는 알 속의 병아리가 부리로 쪼는 소리를 듣고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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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마흔 살시(詩)/이문재 2016. 1. 10. 09:24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 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그림 : 최정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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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모래시계시(詩)/이문재 2015. 5. 17. 16:38
이쯤에서 쓰러지자 이쯤에서 쓰러지자 조금 남겨두기로 하자 당분간 이렇게 쓰러져 있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워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을 살릴 수 있도록 자기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아픔이 기쁜 아픔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의 기쁨이 아픈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아니다 상체를 완전히 비우고 우두커니 서 있도록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자신의 새로운 시간과 만날 수 있도록 이렇게 하체의 힘으로 끝끝내 서 있도록 하자 숨을 죽이고 가느다란 허리의 힘으로 꼿꼿이 서서 기다리기로 하자 (그림 : 김동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