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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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봄날은 간다시(詩)/안도현 2019. 4. 1. 11:16
늙은 도둑놈처럼 시커멓게 생긴 보리밭가에서 떠나지 않고 서 있는 살구나무에 꽃잎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자고 나면 살구나무 가지마다 다닥다닥 누가 꽃잎을 갖다 붙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는 그가 누구인지 꽃잎을 자꾸자꾸 이어붙여 어쩌겠다는 것인지 나는 매일 살구나무 가까이 다가갔으나 꽃잎과 꽃잎 사이 아무도 모르게 봄날이 가고 있었다 나는 호드득 지는 살구꽃을 손으로 받아들다가 또 입으로 받아먹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는데 어느날 들판 한가운데 살구나무에다 돛을 만들어 달고 떠나려는 한척의 커다란 범선(帆船)을 보았다 살구꽃을 피우던 그가 거기 타고 있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보리밭이 파도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서 저 배를 밀어주어야 하나 저 배 위에 나도 훌쩍 몸을 실어야 하나 살구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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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섬시(詩)/안도현 2019. 2. 22. 13:04
'섬'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곳에 파도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게 뭔가 삶이란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 눈을 밝혀야 하리. (그림 : 채기선 화백) (낭독 : 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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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입춘(立春)시(詩)/안도현 2019. 2. 15. 13:52
바깥에 나갔더니 어라, 물소리가 들린다 얼음장 속 버들치들이 꼭 붙잡고 놓지 않았을 물소리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허리춤이 헐렁해진 계곡도 되도록 길게 다리를 뻗고 참았던 오줌을 누고 싶을 것이다 물소리를 놓아버린 뒤에도 버들치들은 귀가 따갑다 몸이 통통해지는 소리가 몸속에서 자꾸 들려왔기 때문이다 입춘(立春) : 24절기의 하나. 음력 1월 중에 있다. 태양의 황경이 315°이며,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가정에서는 콩을 문이나 마루에 뿌려 악귀를 쫓고, 대문기둥·대들보·천장 등에 좋은 글귀를 써붙인다. 입춘이 되면 대문이나 기둥에 한 해의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며 복을 바라는 글귀를 붙이는데 이런 것을 입춘축(立春祝)이라고 한다. (그림 : 한형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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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오늘 하루시(詩)/안도현 2018. 12. 5. 15:24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을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이 깊어지지 않앗고 책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 오래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골목을 돌아설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혁명의 미래를 꿈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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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마흔 살시(詩)/안도현 2018. 9. 10. 22:31
내가 그 동안 이 세상에 한 일이 있다면 소낙비같이 허둥대며 뛰어다닌 일 그리하여 세상의 바짓가랑이에 흙탕물 튀게 한 일 씨발, 세상의 입에서 욕 튀어나오게 한 일 쓰레기 봉투로도 써먹지 못하고 물 한 동이 퍼 담을 수 없는 몸, 그 무게 불린 일 병산서원 만대루 마룻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와이셔츠 단추 다섯 개를 풀자, 곧바로 반성된다 때때로 울컥, 가슴을 치미는 것 때문에 흐르는 강물 위에 돌을 던지던 시절은 갔다 시절은 갔다, 라고 쓸 때 그때가 바야흐로 마흔 살이다 바람이 겨드랑이 털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고 꾸역꾸역 나한테 명함 건넨 자들의 이름을 모두 삭제하고 싶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이제 외로운 일 좀 있어도 좋겠다 (그림 : 김현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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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전야(前夜)시(詩)/안도현 2018. 8. 6. 11:25
늦게 입대하는 친구와 둘러앉아 우리는 소주를 마신다 소주잔에 고인 정든 시간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하는 이 겨울밤 창 밖에는 희끗희끗 삐라 같은 첫눈이 어둠 속을 떠다니고 남들이 스물 갓 넘어 부르던 군가를 꽃피는 서른이 다 되어 불러야 할 친구여, 식탁 가득 주둔중인 접시들이 입 모아 최후의 만찬이 아니야 아니야 그래, 때가 되면 떠나는 것 까짓 것 누구나 때가 되면 소주를 마시며 모두 버리고 가면 되는 것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버려도 버려도 끝까지 우리 몸에 남는 것은 밥과 의무, 흉터들 제각기 숨가빴던 시절들을 등뒤로 감추고 입술 쓴 소주잔을 주거니받거니 돌리노라면 옷소매 밑에 드러나는 부끄러운 흰 손목이여, 얼마나 많은 치욕이 우리의 두 손목을 적시며 흘러갔는지 늦은 친구가 머리를 깍으러 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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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연애시(詩)/안도현 2018. 4. 3. 22:22
연애 시절 그때가 좋았는가 들녘에서도 바닷가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이 세상에 오직 두 사람만 있던 시절 사시사철 바라보는 곳마다 진달래 붉게 피고 비가 왔다 하면 억수비 눈이 내렸다 하면 폭설 오도가도 못하고, 가만 있지는 더욱 못하고 길거리에서 찻집에서 자취방에서 쓸쓸하고 높던 연애 그때가 좋았는가 연애 시절아, 너를 부르다가 나는 등짝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다 무릇 연애란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기에 문득 문득 사람이 사람을 벗어버리고 아아, 어린 늑대가 되어 마음을 숨기고 여우가 되어 꼬리를 숨기고 바람 부는 곳에서 오랜 동안 흑흑 울고 싶은 것이기에 연애 시절아, 그날은 가도 두 사람은 남아 있다 우리가 서로 주고 싶은 것이 많아서 오늘도 밤하늘에는 별이 뜬다 연애 시절아, 그것 봐라 사랑은 쓰러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