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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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풍산국민학교시(詩)/안도현 2017. 12. 23. 21:10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 하던 그 아이들은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 놓고갔다는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매일 밤마다 밀린 숙제가 잠끝까지 따라 들어오곤 하였다 붉은 리트머스 종이 위로 가을이 한창 물들어갈 무렵 내 소풍날은 김밥이 터지고 운동회날은 물통이 새고 그래 그날 주먹 같은 모래주머니 마구 던져대던 폭죽터뜨리기 아아 그때부터였다 청군 백군 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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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첫눈 오는 날 만나자시(詩)/안도현 2017. 11. 26. 13:39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희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을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 놓은 군밤을 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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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모퉁이시(詩)/안도현 2017. 10. 19. 17:51
모퉁이가 없다면 그리운 게 뭐가 있겠어 비행기 활주로, 고속도로, 그리고 모든 막대기들과 모퉁이 없는 남자들만 있다면 뭐가 그립기나 하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계집애들의 고무줄 끊고 숨을 일도 없었겠지 빨간 사과처럼 팔딱이는 심장을 쓸어내릴 일도 없었을 테고 하굣길에 그 계집애네 집을 힐끔거리며 바라볼 일도 없었겠지 인생이 운동장처럼 막막했을 거야 모퉁이가 없다면 자전거 핸들을 어떻게 멋지게 꺾었겠어 너하고 어떻게 담벼락에서 키스할 수 있었겠어 예비군 훈련 가서 어떻게 맘대로 오줌을 내갈겼겠어 먼 훗날, 내가 너를 배반해볼 꿈을 꾸기나 했겠어 모퉁이가 없다면 말이야 골목이 아냐 그리움이 모퉁이를 만드는 거야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모퉁이를 만드는 거야 (그림 : 한영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