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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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원추리여관시(詩)/안도현 2017. 8. 9. 21:05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꽃대를 밀어 올렸나 원추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후회했다 꽃대 위로 붉은 새가 날아와 꽁지를 폈다 접었다 하고 있었다, 원추리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내어주고 다음 달부터 여관비를 인상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멀리서 온 것이나 키가 큰 것은 다 아슬아슬해서 슬픈 것이고 꽃밭에 널어놓은 담요들이 시들시들 마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어린 잠자리들의 휴게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도 되는지 면사무소에 문의해 볼까 싶었지만 버스를 타고 올라오기에는 너무나 멀고 낡은 집이어서 관두기로 했다 원추리 꽃대 그늘이 흔들리다가 절반쯤 고개를 접은 터였다 (그림 : 김의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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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아버지의 런닝구시(詩)/안도현 2017. 7. 22. 19:20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닝구 백기(白旗)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게를 많이 져서 등판부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너덜너덜 살이 헤지면 쓸쓸해져서 걸레로 질컥거리던 런닝구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방다닥에 축 늘어져 눕던 런닝구 마흔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는 런닝구 (그림 : 강연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