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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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만두집시(詩)/안도현 2021. 4. 8. 12:46
세상 가득 은행잎이 흐득흐득 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늦가을이었다 교복을 만두속같이 가방에 쑤셔넣고 까까머리 나는 너를 보고 싶었다 하얀 김이 왈칵 안경을 감싸는 만두집에 그날도 너는 앉아 있었다 통만두가 나올 때까지 주머니 속 가랑잎 같은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무슨 대륙 냄새가 나는 차를 몇 잔이고 마셨다 가슴을 적시는 뜨거운 그 무엇이 나를 지나가고 잔을 비울 때마다 배꼽 큰 주전자를 힘겹게 들고 오던 수학 시간에 공책에 수없이 그린 너의 얼굴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귀 밑에 밤알만한 검은 점이 있는 만두집 아저씨 중국 사람과 웃으면 덧니가 처녀 같은 만두집 아줌마 조선 사람사이에 태어난 화교학교에 다닌다는 그 딸 너는 계산대 앞에 여우같이 앉아 있었다 한 번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지 않고 미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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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나중에 다시 태어난다면시(詩)/안도현 2020. 12. 10. 15:50
나중에 다시 태어나면 나 자전거가 되리 한평생 왼쪽과 오른쪽 어느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고 말랑말랑한 맨발로 땅을 만져보리 구부러진 길은 반듯하게 펴고, 반듯한 길은 구부리기도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모퉁이, 움푹 파인 구덩이, 모난 돌멩이들 내 두 바퀴에 감아 기억하리 가위가 광목천 가르듯이 바람을 가르겠지만 바람을 찢어발기진 않으리 나 어느날은 구름이 머문 곳의 주소를 물으러 가고 또 어느날은 잃어버린 달의 반지를 찾으러 가기도 하리 페달을 밟는 발바닥은 촉촉해지고 발목은 굵어지고 종아리는 딴딴해지리 게을러지고 싶으면 체인을 몰래 스르르 풀고 페달을 헛돌게도 하리 굴러가는 시간보다 담벼락에 어깨를 기대고 바퀴살로 햇살이나 하릴없이 돌리는 날이 많을수록 좋으리 그러다가 천천히 언덕 위 옛 애인의 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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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호미시(詩)/안도현 2020. 10. 15. 17:51
호미 한자루를 사면서 농업에 대한 지식을 장악했다고 착각한 적이 있었다 안쪽으로 휘어져 바깥쪽으로 뻗지는 못하고 안쪽으로만 날을 세우고 서너평을 나는 농사라고 호미는 땅에 콕콕 점을 찍으며 살았다고 말했다 불이 호미를 구부렸다는 걸 나는 당최 알지 못했다 나는 호미 자루를 잡고 세상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너를 대지의 허벅지를 물어뜯거나 물길의 방향를 틀어 돌려세우는 일에 종사하지 못했다 그것은 호미도 나도 가금 외로웠다는 뜻도 된다 다만 한철 상추밭이 푸르렀다는 것, 부추꽃이 오종종했다는 것은 오래 기억해둘 일이다 호미는 불에 달구어질 때부터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렸을 것이다 날 끝으로 더이상 뻗어나가지 않으려고 간신히 참으면서 서리 내린 파밭에서 대파가 고개를 꺾는 입동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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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석류시(詩)/안도현 2019. 10. 28. 13:56
마당가에 석류나무 한 그루를 심고 나서 나도 지구 위에다 나무 한 그루를 심었노라, 나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몰랐지요 그때부터 내 몸은 근지럽기 시작했는데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석류나무도 제 몸을 마구 긁는 것이었어요 새 잎을 피워 올리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긁는 통에 결국 주홍빛 진물까지 흐르더군요 그래요, 석류꽃이 피어났던 거죠 나는 새털구름의 마룻장을 뜯어다가 여름내 마당에 평상을 깔고 눈알이 붉게 물들도록 실컷 꽃을 바라보았지요 나는 정말 좋아서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가을이 찾아 왔어요 나한테 보라는 듯이 입을 딱, 벌리고 말이에요 가을도, 도대체 참을 수 없다는 거였어요 (그림 : 이금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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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시(詩)/안도현 2019. 4. 13. 15:44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 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 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 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 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열몇 살 때 그 집 뒤뜰에 내가 당신을 심어놓고 떠났다는 것 모르고 살았네 당신한테서 해마다 주렁주렁 물방물 아가들이 열렸다 했네 누군가 물방울에 동그랗게 새겼을 잇자국을 떠올리며 미어지는 것을 내려놓느라 한동안 아팠네 간절한 것은 통증이 있어서 당신에게 사랑한다는 말 하고 나면 이 쟁반 위 사과 한 알에 세 들어 사는 곪은 자국이 당신하고 눈 맞추려는 내 눈동자인 것 같아서 나 여기 있고, 당신 거기 있으므로 기차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