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상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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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희구 - 밝고 온유한 것들이시(詩)/상희구 2015. 5. 11. 11:23
봄이다 신생(新生)이다. 여기저기서 밝고 온유한 것들이 몰려온다 야트막한 야산 둔덕 지난 해 죽고 말라 비틀어진 잡풀들 사이로 쇠비름, 개망초, 쑥부쟁이, 씀바귀 같은 자잘한 것들이 생기있는 얼굴을 내민다 암탉이 햇병아리 떼를 이끌고 종종걸음을 친다 논배미의 갈아엎은 흙무더기 사이로 땅강아지 한 마리가 쏜살같이 달아난다 아 온갖 것들이 몰려온다 성한 것 하찮은 미물들 할 것 없이 저마다 가슴 속의 하늘을 열어젖히며 ... 뭔가 밝고 온유한 것들이 대기를 가득 채운다 (그림 : 민경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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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희구 - 지리상갈상시(詩)/상희구 2015. 5. 11. 11:06
빨래꺼리를 뒤적거리던 엄마가 숨 끊어진 다음의 자투리 같은 끓는 소리로 내뱉었다 - 아이구 우얐끼네라, 쟈, 속옷이 지리상갈상 떨어졌구나! 딴 거로 빈줄라 가주고라도 퍼떡 니 내복 부터 한 불 사재이 지리상갈상 : 산산조각, 갈기갈기의 뜻 우얐끼네랴 : 어쩌겠나 쟈 : 저애 떨어졌구나 : 헤어졌구나 딴 거로 : 다른 것으로 니 : 너 빈줄라 가주고 : 어떤 정해진 量에서 한 쪽의 양을 줄이고 그 줄인 양만큼 다른 쪽에 쓰는 것 퍼뜩 : 얼른 한 불 : 한 벌 사재이 : 사자꾸나 (그림 : 김대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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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희구 - 남문시장시(詩)/상희구 2015. 5. 11. 10:26
영둥할마이가 올라갈라 카능강 날씨가 엄청 칩다 날씨가 칩어서 장사는 하낱도 안 되는데 옹기장사 할매는 옹구리고 앉았고 소깝장사 할배는 움추리고 앉았다 남문시장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있는 재래시장 영둥할마이(영등할매, 영동할매) : 음력 2월 초하루는 ‘영등일‘ 또는 ’영등할매날‘이라고 하는데 하늘에 있는 영등할매가 이날 땅에 내려왔다가 스무날(20일)이면 다시 올라간다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영등신앙은 주로 영남과 제주도 지방에 전승되었는데 영등할매가 비바람을 몰고 온다고 생각합니다.그런데 이날 바람이 불면 딸을 데리고 오는 것으로 딸이 차려입은 치마가 나풀대어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 바람을 불게 하며, 흉년이 든다고 믿습니다. 만일 비가 오면 며느리가 곱게 차려입은 명주치마를 얼룩지게 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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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희구 - 자꾸만 장구가 되어가던 쌀통시(詩)/상희구 2015. 5. 10. 15:25
대구 칠성동 단칸방 시절 큼지막한 손아귀 둘이 포개져서 악수하는 그림 위로 글귀도 선명한 UNKRA 유엔한국재건단의 커다란 원통형 분유통을 우리 집 쌀통으로 썼는데 쌀이나 보리가 그득할 때는 도무지 쌀통이란 것이 둔중하고 묵직해서 한 됫박을 퍼내도 그만 한 말을 퍼내도 그만이어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용물이 점점 줄어들어 속이 비게 되면 이 쌀통은 큰 울림통의 장구처럼 되어 마침내 울기 시작한다. 어느 늦은 봄날 이었던가 신새벽, 몰래 일어나신 엄마가 바닥을 들어내기 시작한 쌀통을 긁자 쌀통이 버어억― 버어억 울었다. “아이고 이 새끼들 우짜꼬” “아이고 이 새끼들 우짜꼬” 엄마가 숨 끊어진 다음의 자투리같은 끓는 소리로 내 뱉었다. 나는 그때부터 새벽잠이 없어졌다. 장구든 북이든 쌀통이든 속을 비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