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태준
-
문태준 - 배꽃 고운 길시(詩)/문태준 2015. 9. 17. 21:42
봄이 되면 자꾸 세상이 술렁거려 냄새도 넌출처럼 번져가는 것이었다 똥장군을 진 아버지가 건너가던 배꽃 고운 길이 자꾸 보이는 것이었다 땅에 묻힌 커다란 항아리에다 식구들은 봄나무의 꽃봉오리처럼 몸을 열어 똥을 쏟아낸 것인데 아버지는 봄볕이 붐비는 오후 무렵 예의 그 기다란 냄새의 넌출을 끌고 봄밭으로 가는 것이었다 그러곤 하얀 배밭 언덕 호박 자리에 그 냄새를 부어 호박넌출을 키우는 것이었다 봄이 되면 세상이 술렁거려 나는 아직도 봄은 배꽃 고운 들길을 가던 기다란 냄새의 넌출 같기만 한 것이었다 (그림 : 이의성 화백)
-
문태준 - 한 마리 멧새시(詩)/문태준 2015. 9. 17. 21:37
소복하게 내린 첫눈 위에 찍어놓은 한 마리 멧새 발자국 첫잎 같다 발자국이 흔들린 것 보니 그자리서 깔깔 웃다 가셨다 뒤란이 궁금해 그곳까지 다녀가셨다 가늘은 발뒤꿈치를 들어 찍은 그 발자국을 그러모아 두 귀에 부었다 맑은 수액 같다 귀에 넣고 이리저리 흔들어대니 졸졸 우신다 좁쌀 같은 소리들 귀가 시원하다 발자국을 따라가니 내 발이 아직 따뜻하다 멧새 한 마리 시골집 울에 내려와 가늘은 발목을 얹어 앉아 붉은 맨발로 마른 목욕을 즐기신다 간밤에 다녀간 그분 같은데 밤새 시골집을 다 돌아보고선 능청을 떨고 빈 마루를 들여다보고 계신다 (그림 : 김영주 화백)
-
문태준 - 바닥시(詩)/문태준 2015. 8. 3. 10:54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남길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그림 : 김영철 화백)
-
문태준 - 어두워지는 순간시(詩)/문태준 2015. 6. 7. 11:18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 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