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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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중심이라고 믿었던 게 어느날시(詩)/문태준 2014. 8. 27. 02:28
못자리 무논에 산그림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물처럼 한사람이 그리운 날 있으니 게눈처럼, 봄나무에 새순이 올라오는 것 같은 오후 자목련을 넋 놓고 바라본다 우리가 믿었던 중심은 사실 중심이 아니었을지도 저 수많고 작고 여린 순들이 봄나무에게 중심이듯 환약처럼 뭉친 것만이 중심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리움이 누구 하나를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아닌지 모른다 물빛처럼 평등한 옛날 얼굴들이 꽃나무를 보는 오후에 나를 눈물나게 하는 지도 모른다 그믐밤 흙길을 혼자 걸어갈 때 어둠의 중심은 모두 평등하듯 어느 하나의 물이 산그림자를 무논으로 끌고 들어갈 수 없듯이 (그림 : 오유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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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여름밭시(詩)/문태준 2014. 8. 27. 01:17
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그림 : 정봉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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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빈집의 약속시(詩)/문태준 2014. 6. 6. 12:23
(낭송 : 문태준 시인)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별이 보고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에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 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켠에 묵은 메주를 매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 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 년 혹은 백 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 숲이 들어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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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극빈시(詩)/문태준 2014. 1. 3. 22:37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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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먼 곳시(詩)/문태준 2014. 1. 2. 12:07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쿰, 한움쿰,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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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시(詩)/문태준 2014. 1. 2. 12:04
혼(魂)이 오늘은 유빙(流氷)처럼 떠가네 살차게 뒤척이는 기다란 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이곳에서의 일생(一生)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 꿈속 마당에 큰 꽃나무가 붉더니 꽃나무는 사라지고 꿈은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식은 허물이 되었다 초생(草生)을 보여주더니 마른 풀과 살얼음의 주저앉은 둥근 자리를 보여주었다 가볍고 상쾌한 유모차가 앞서 가더니 절룩이고 초라한 거지가 뒤따라왔다 새의 햇곡식 같은 새의 아침 노래가 가슴속에 있더니 텅 빈 곡식 창고 같은 둥지를 내 머리 위에 이게 되었다 여동생을 잃고 차례로 아이를 잃고 그 구체적인 나의 세계의,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 맨몸에 상복(喪服)을 입혀주었다 누가 있을까, 강을 따라갔다 돌아서지 않은 이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지 않은 이 누가 있을까, 눈시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