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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태준 - 어두워지는 순간
    시(詩)/문태준 2015. 6. 7. 11:18

     

     

    어두워지는 순간에는 사람도 있고 돌도 있고 풀도 있고 흙덩이도 있고 꽃도 있어서 다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바람이 불고 불어와서 문에 문구멍을 내는 것보다 더 오래여서 기록할 수 없네

    어두워지는 것은 하늘에 누군가 있어 버무린다는 느낌,

    오래오래 전의 시간과 방금의 시간과 지금의 시간을 버무린다는 느낌,

    사람과 돌과 풀과 흙덩이와 꽃을 한 사발에 넣어 부드럽게 때로 억세게 버무린다는 느낌,

    어두워지는 것은 그래서 까무룩하게 잊었던 게 살아나고 구중중하던 게 빛깔을 잊어버리는 아주 황홀한 것,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얻으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어두워지려는 때에는 개도 있고, 멧새도 있고, 아카시아 흰 꽃도 있고, 호미도 있고, 마당에 서 있는 나도 있고…….

    그 모든 게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늑대처럼 오래 울고, 멧새는 여울처럼 울고, 아카시아 흰 꽃은 쌀밥 덩어리처럼 매달려 있고,

    호미는 밭에서 돌아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고,

    마당에 선 나는 죽은 갈치처럼 어디에라도 영원히 눕고 싶고……. 그 모든 게 달려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개는 다른 개의 배에서 머무르다 태어나서 성장하다 지금은 새끼를 밴 개이고,

    멧새는 좁쌀처럼 울다가 조약돌처럼 울다가 지금은 여울처럼 우는 멧새이고,

    아카시아 흰 꽃은 여러 날 찬밥을 푹 쪄서 흰 천에 쏟아 놓은 아카시아 흰 꽃이고……. 그 모든 게 이력이 있어서 나는 기록할 수 없네

    오늘은 어머니가 서당골로 산미나리를 베러 간 사이 어두워지려 하는데

    이상하지, 오늘은 어머니가 이것들을 다 버무려서

    서당골에서 내려오면서 개도 멧새도 아카시아 흰 꽃도 호미도 마당에 선 나도 한 사발에 넣고 다 버무려서,

    그 모든 시간들도 한꺼번에 다 버무려서

    어머니가 옆구리에 산미나리를 쪄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세상이 다 어두워졌네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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