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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헌 - 황학동 물고기의 추억시(詩)/시(詩) 2019. 6. 27. 09:14
청계천 8가 부근에 가면 위태로운 것들이 많다
노숙자의 낡은 옷처럼 수명이 다 된
삼일아파트 뒷길을 돌아 황학동에 가면
추억 속으로 방생했던 물고기들이 모여 산다
한때 이 나라 구석구석 물 좋은 곳에서만 놀았던
때깔 좋고 튼튼한 녀석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추억을 잔뜩 먹어
만삭이 된 배를 내밀며 헤엄쳐 다니고 있다
누가 나 좀 데려가 주세요
여긴 더 이상 헤엄칠 곳이 없어요
변화가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와
오래도록 얼굴을 점령하고 있는
기미자국처럼 쓸쓸한 일이다
황학동에 이주한 자존심을
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괜히 옛 추억을 들먹이진 않는다
한낮의 햇살을 불러 올 때쯤이면
더러 성질 급한 놈 몇 마리는
물살을 휩쓸고 돌아다니다 붙잡혀서
제값도 못 받고 쉽게 팔려 나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귀한 몸이다
살아온 날만큼 지워지는 것이 추억이라 해도
벼룩, 도깨비, 개미의 이름을 따라
추억의 폐부 속으로 흘러가는 물고기는
또 은밀한 비밀 하나를 만들 것이다.황학동 만물시장(벼룩시장,도깨비시장) : 청계천 7가, 8가 사이 삼일아파트 뒷편에 위치한 황학동 만물시장은 전국 구석구석을 벼룩 뛰듯 돌아다니며
희귀한 물건을 모아온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옛날 시골집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물건들이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과거 전국의 골동품 집산지였으나, 1983년 6월 장안평에 고 미술품 집단상가가 조성되면서 많은 점포들이 옮겨가
지금은 고미술품 판매점이 10여군데에 불과하나 대신 이자리에 중고품 만물상들이 하나, 둘 자연스럽게 모여들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림 : 백용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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