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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완두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길들여지면서
열매가 다 익은 후에도
자발적으로 깍지가 열려
씨앗을 퍼뜨리는 능력을
최대한 억제할 수 있었으므로
식용작물이 되었다.
꼬투리를 잡은 누군가의 손이
비틀린 멱살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줄 때까지
입 꽉 다물어 속을 비치지 않았기에
사랑받았고
함부로 옷이 벗겨져
다섯 알 중 네 개를 잃고도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다는 산술로
계약을 따냈다.
완두는 좀처럼 터지지 않는다.
분노하지 않는 초록의 순종으로서
같은 껍질 속 똑같이 생긴 얼굴로
가지런히 줄 서 기다리며
선별과 배제는 우연이거나
더 높은 곳의 뜻임을
순순하게 다짐하는 겸손한 위치에서조차
간택되기 위해 무거워진 목을 늘어뜨린
비산도 탈출도 하지 않는 어여쁜 두상들
(그림 : 유예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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