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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희 - 열무김치가 슬프다시(詩)/권선희 2014. 2. 21. 22:17
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은 장날이었지
열무 두 단을 샀어
시들어 버린 오후
짚으로 묶인 허리가 짓무르고 있었지만
어디 내 속만 하겠어
벌레 갉은 구멍 숭숭했지만
묵직했고 고작 두 덩어리지만
무수한 몸이 한데 묶여 있었거든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무겁고 길었어
신문지를 깔고 털퍼덕 앉아 다듬었지
뿌리 잘라내고 웃자란 잎도 잘랐어
나를 다듬고 있었는지도 몰라
반쪽으로 꿈틀대는 애벌레처럼
희날재 어디쯤 지나고 있을 너를
지금이라도 따라 갈까
망설이기도 하면서 말이야
굵은 소금을 뿌리며 생각했어
잘만 버무리면
고추장에 쓱쓱 비벼 슬픔도 보리밥처럼
넘길 수 있을 거라고 말이지
너를 배웅하던 정류장까지도
아마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야
안 그래?
(그림 : 강주현 화백)'시(詩) > 권선희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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