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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초 - 황방산의 달
    시(詩)/이병초 2013. 12. 26. 14:22

     

    1.

    바람이 불 때마다
    아카시아꽃이 눈처럼 쏟아졌다
    작은 꽃들이 하얗게
    잡목으로 찌든 숲에
    내 발길에 내려 앉았다
    어디였을까
    참새알을 꺼내러 갔다가
    구렁이 밟고 소스라치던 길
    소스라치던 유년을 매달고
    죽자사자 내빼던 거기
    친구도 참새알도 없는
    어린 콩잎만 바람타던 거기
    기계충 먹은 까까머리 들이밀며
    되돌아갈 수 없는 행랑을 꾸렸던
    저기 황방산 기슭

    너 뭐하러 왔냐고
    스님이 물었다 나는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할머니 만나러 왔냐
    절밥 먹으러 왔냐
    오늘은 굿도 없는 날인디
    여그는 왜 왔냐
    자꾸 내 고추를 만지려드는
    스님은 껄껄대고 웃고
    오갈이 팍 든 가랭이를 나는
    어쩌지 못했다 여그가
    어딘 중이나 알고 왔냐
    묵은 절이요 아니다
    서고사요 아니다 아니다

    묵은 절도 서고사도 아닌
    묵은 기와집 한 채
    너 뭐하러 왔냐고
    다시 묻고 있다

    2.

    일제 때 우리나라 지도를 흉내내어
    파들어 갔다가, 포항 쪽에서 틀렸다던가
    부산 쪽에서 틀렸다던가
    그래서 이름이 틀못인 물너울에
    오종종 들바람이 쏘다닌다
    성록이 형이 내 허벅지만한
    잉어를 끌어냈고, 낚시꾼들 밀밥이
    날마다 허천났다지만
    황토 몇 바작을 쏟아놨어도
    몇 날 며칠 맨탕이었던 틀못
    곗돈 떼먹고 누가 어디로 도망갔고
    누가 누구랑 붙어먹었고
    노름빛에 넘어간 건너물 밭뙈기며
    목매 죽은 사연까지
    훤히 알고 있는 틀못
    어디서 틀렸는지도 모르고
    맨살 드러난 논밭뙈기로 번져오는
    물비늘마다
    물컹물컹 하늘이 밟힌다

    3.

    보리밥티 묻은 감자밥 먹고
    치약도 짜먹고 놀았던 집
    윗목에 새는 빗물을 벌받고 서서
    자꾸만 오줌이 마렵던 집
    텃밭에 가지가 니자지내자지 열리고
    호박꽃이 비를 맞던 집, 똥깐에
    똥이 났던가 두꺼비가 났던가
    비만 오면 왼 집안이 축축하던
    곰팡이집

    헛간은 늘 어두웠다
    둘둘 말린 멍석이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보리가마, 홀태, 비료푸대
    채 담지 못한 감자들이
    쪽창빛을 받아냈다
    아버지 새 자전거 호꾸 부러뜨렸다고
    솔직하게 안 털어놨다고
    꾀벗기어 매맞고 이 헛간에
    쾅 갇히어, 얼마나 지났을까
    구렁이 감아놓은 것처럼 매맞은 살갗이
    쓰리고 슬슬 가렵고 할 무렵
    헛간은 어둡지 않았다
    채 담지 못한 감자들이 하얗게
    눈을 뜨고 나를 보았다
    지붕마다 골목마다 펑펑펑
    하얀 눈이 내려도 헛간에는
    쥐발자욱이 어지럽다

    4.

    더위가 한풀 꺾였다
    거기가 거기 같은 잡목숲을
    땀 흘리며 오른다
    수랑둘배미에 뒹구는 똥지게와
    맨살 드러낸 밭뙈기가 보인다
    소먹이고 피뽑고 들밥 먹던
    텃논 미나리꽝 건너물 방죽밑이 여시미

    참게가 있을까
    우렁도 미꾸라지도 있을까
    핑계삼아 나온 수랑둘배미
    갈수록 묵는 논들이 많다
    참게는커녕 송사리 한 마리 안 보이고
    한겨울에도 고기 품어먹었던 수로에
    음식찌꺼기가 떠다닌다
    아홉마지기 발치에 매운탕집이 들어섰고
    토지개발공사의 땅장사 끝난
    전주시 제 2공단

    빼빼마른 장딴지들이 보인다
    할아버지 이빠진 숨소리가 들린다
    도구통에 짓찧던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5.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바람이 참 시원하다
    저기가 공설운동장이고 전매청이고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이 어떻게
    변했는지 나는 모른다
    새 건물이 엄청 들어섰다는 것만
    알 뿐이다 눈앞에 우리 선산이
    파헤쳐졌고 동철이네 살던 서곡도
    몇 채 안 남았다
    똥물고기가 팔둑만씩하다는 저 전주천
    등 뒤는 돌아보지 말자
    안 봐도 훤한 옥계동 틀못 뒤얼리

    죽고살고 일해댄
    저 논밭뙈기를 뒤돌아보지 말자
    우린 깡치없인 못산다 세 손가락 남은
    노규의 오른손에 장 지지고 소줏잔을 비우며
    쓰레트 고기를 굽던 자리
    야물야물 들불이 타오르던 자리
    지금은 무슨 티끄락 같은 것들이 자꾸만
    눈알을 찌르는 자리

    뒤돌아보아도 소용없는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달이 뜨는
    등질 수 없는 등 뒤로 돌아서기 위하여
    황방산 오밤중에 뻐꾹새 운다

    (그림 : 조선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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