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전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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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신문보는 남자시(詩)/전윤호 2019. 8. 27. 09:57
위성도시로 가는 전철에서 손잡이에 매달려 내일자 조간을 읽는 남자 반을 접어도 옆사람과 부딪치는 정치면을 ... 두 번 읽는 남자 아파트 분양공고 위에 땀방울을 떨구는 남자 최고 발행부수의 권위를 신뢰하고 독설이 강한 사설에 이마가 조금씩 벗겨지는 남자 선거 때마다 고민하면서도 늘상 1번만 찍은 남자 매일 300원짜리 신문을 사면서 중산층이 된 남자 한번도 어제 기사를 다시 읽어보지 않은 남자 종점까지 가서 내일을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은 남자 네 컷짜리 만화보다도 볼 게 없는 어딘지 낯익은 남자 (그림 : 오효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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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백 미터시(詩)/전윤호 2019. 7. 1. 12:13
마침내 말 한 번 걸어보려 검은 교복 입고 뒤쫓던 역전 다리 위 백 미터 어두운 공설운동장에서 한 시간 미리 도착하고도 딱 그만큼 달아나버린 정신줄 목사님이 신자가 아니면 사귀지 말래 저주처럼 붉은 십자가에 돌팔매질하던 거리 나이 먹고 친구로 만나도 같이 마시고 함께 취해도 저만치 앞서 걷는 그녀와의 사이 작심하고 달려도 평생 건너지 못한 아우라지 건너편 솔밭 같은 백 미터 그 지긋지긋한 부탁받은 척 흰 봉투 들고 망설이며 서 있는 장례식장 안내판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별과의 거리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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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무심코 정선시(詩)/전윤호 2019. 5. 10. 12:02
뭐 후회한다고 그때가 돌아오나 젖은 눈을 가진 계집애들은 먼 데로 혼처를 찾아 떠나고 탄처럼 시커멓던 사내놈들은 타관을 떠돌다 늙어 배불뚝이가 되었다 다시 찾아온다고 옛사랑이 기다려 주나 불빛이 제 몸만 간신히 밝히는 공설운동장에서 토끼처럼 떨며 입 맞추던 애송이들 어디로 갔나 배신에 울면서 친구에게 주먹질하던 도무지 어른이 될 것 같지 않던 천둥벌거숭이들 친절하지 못한 미래를 욕하며 함부로 침을 뱉던 골목은 사라지고 우산을 펼친 시장엔 검은 비닐봉다리 하나씩 들고 낯선 사람들이 웃고 있는데 역전으로 가는 강가에 묶인 배처럼 흔들리며 너를 생각한다고 그때가 돌아오겠나 (그림 : 황재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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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수몰지구시(詩)/전윤호 2019. 4. 22. 12:12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 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기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 (그림 : 신제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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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입구에서시(詩)/전윤호 2019. 4. 22. 09:00
도원이 별다른 줄 안다면 실망하지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뭐 오종종한 집들과 넓지 않은 논과 밭 그저 꽃나무가 많은 걸 빼면 여느 동네와 다를 게 없어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살아보지 않으면 여기가 도원인 줄은 알 수가 없지 함께 산다고 해도 마음이 다르면 불편한 곳 남아돌 정도로 풍성한 건 없고 그저 모자란 듯 참을 만하지 다른 데 가다가 샛길로 빠져 아무 생각 없이 들어와 지나가며 본 사람도 있고 며칠 머물다가 바쁜 일이 생각나 간 사람도 있어 그들에게 도원은 그저 꽃나무가 많은 마을 입구는 열려 있어도 도원을 찾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고 도원에 들어와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소용이 없으니 그냥 평범한 평화로운 동네 누구나 한 번쯤은 다녀온 곳일지도 몰라 (그림 : 윤정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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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손톱시(詩)/전윤호 2019. 4. 22. 08:57
나 같은 얼간이에게 사랑은 손톱과 같아서 너무 자라면 불편해진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웃자란 손톱이 불편해 화가 난다 제 못난 탓에 괴로운 밤 죄 없는 사람과 이별을 결심한다 손톱깎이의 단호함처럼 철컥철컥 내 속을 깎는다 아무 데나 버려지는 기억들 나처럼 모자란 놈에게 사랑은 쌀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니어서 함부로 잘라버린 후 귀가 먹먹한 슬픔을 느끼고 손바닥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을 안다 다시 손톱이 자랄 때가 되면 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림 : 정형대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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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메밀전병시(詩)/전윤호 2019. 4. 22. 08:52
강원도 정선 오일장에 가면 함백산 주목처럼 비틀어진 할머니들이 부침개를 파는 골목이 있지 가소로운 세월이 번들거리는 불판에 알량한 행운처럼 얇은 메밀전을 부치고 설움을 잘게 다진 묵은지로 전병을 만들지 참 못생기고 퉁명스런 서방이 대낮에 이불 둘둘 말고 자빠진 모양 한입 씹으면 시금털털한 사는 맛을 느끼지 함석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들으며 옥수수막걸리를 마시던 친구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뒤통수만 보여 주며 달아나던 처녀들도 간 곳 없는데 이 땅의 하늘을 떠받친 태백산맥 아래 아라리 흐르는 강 사이로 메밀전병 부치는 할머니들은 고소한 기름 냄새 풍기며 아직 그 자리에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