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전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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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붉은 볼시(詩)/전윤호 2018. 1. 3. 16:23
동백은 배우지도 못했는데 이별부터 당한 첫사랑인 양 붉은 볼을 보여준다 바다가 보이는 벼랑에서 왜 다들 떠나간 겨울에 피는지 주지도 없이 방치된 암자에서 부처는 자물쇠로 잠겨 있고 무너진 석등 위로 바다가 넘실대는데 입맞춤 한번 하기도 전에 왜 무참히 떨어져버리는지 겨울 여객선 떠나는 항구에 어혈처럼 스미는 동백 변명하듯 뱃고동이 울리고 가라 어여 가라 등을 떠미는 파도 동백은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으니 어느 겨울 또 다른 내가 찾아오면 첫사랑인 양 붉은 볼을 보여주리라 (그림 : 김상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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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도원 가는 길시(詩)/전윤호 2017. 10. 15. 13:14
정선이나 강릉을 가다가 길을 잃고 안개 낀 재 하나 잘못 넘으면 도원읍에 닿습니다. 핸드폰도 터지지 않고 라디오도 잡히지 않는 곳 석회암이 앙상한 두 개의 산 사이 수달이 어름치를 잡아먹는 강이 흐르고 읍내엔 일백 오십 호 주민들이 삽니다. 아이가 어른 같고 어른이 아이 같은 그곳에선 시간이 황종류석처럼 더디게 자라고 조폐공사에서 찍은 돈은 쓰이지 않습니다. 주막에 가고 싶으면 산나물을 뜯어 오십시오. 곤두레 딱주기 누리대를 구별할 줄 안다면 그곳에 살아도 됩니다. 물레방앗간에서 이모장네 맏며느리와 함께 당신은 행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난이 불편한 사람은 오래 머물지 말고 쓴 약수나 한 모금 마시고 나오십시오. 재 하나만 넘으면 또 다른 마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림 : 정인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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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윤호 - 내가 고향이다시(詩)/전윤호 2017. 10. 5. 21:46
추석에 집에 있기로 했다 친정이 없어진 아내와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올 명절은 집에서 쉴 거라 했다 시장에서 송편을 사고 보름달이 뜨면 옥상에서 구경하자고 했다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컴퓨터 게임을 사고 인터넷으로 떠난다 괜히 적적한 척 서울에 있을 선배에게 전화해 그날 저녁 만나기로 했다 문을 닫고 돌아누운 어두운 거리에도 작은 수족관에 불을 켜고 물방울 같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문 여는 술집이 있을 거라고 텅 빈 시내버스처럼 반겨줄 사람이 없는 성묘객이 끊어진 무덤처럼 내가 고향이다 (그림 : 신운주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