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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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시(詩)/배한봉 2014. 11. 18. 22:37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 가을 보름달 뜨면 친구여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보세 휘영청 쌓이는 달빛도 달빛이지만, 밤 기러기 찬 하늘에 걸리듯 한 개 섬이어서 외로운 우리 삶 강바닥 물살 지는 은모래 마냥 훤히 드러나게 가슴 펴고 앉아보세 그 자리, 햇콩 갈아 무쇠솥에 끓여 만든 손두부 몇 모, 동동주 몇 잔이면 세상도 다 허심탄회해질 것이니, 토종 콩 맛 같은 우리 우정 젓가락 부딪치며 낄낄거려나 보세 남보다 앞서겠다고, 잘 살아 보겠다고 엎어지고 부딪치며 살아온 우리 가을볕에 콩 껍질 터지듯 오늘은 파안대소, 시간을 잊어보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벗을 가진 사람 여보게 우리, 관중·포숙도 부럽잖게 가을 보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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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씨팔!시(詩)/배한봉 2014. 11. 18. 22:31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앗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 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질문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그림 : 이현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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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시(詩)/배한봉 2014. 9. 8. 14:04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뚝, 뚝, 그 소리는 새벽까지 내 잠을 두드렸고 나는 어서 잠들기만을 원했습니다. 물방울소리를 더 견디지 못한 잠은 바늘처럼 뾰족해졌고 나는 비닐로 수도의 입을 묶어버렸지요. 그러나 혼몽한 가운데서도 내가 물을 따라간 것인지 물이 내 의식 속으로 스며든 것인지 나중에는 사방이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흐르겠다는 물을 막는다고 해서 멈추겠어요? 잘못은 내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는 물의 괴로움을 탓했던 것이 내 괴로움의 원인이었지요. 노래하겠다는 새의 부리를 봉해버린 것처럼. (그림 : 강민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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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나물 삑까리시(詩)/배한봉 2014. 8. 26. 00:50
우리 과수원에는 풀이 없다 나물 삑까리다 꼬사리, 정구지, 둘훕, 치나물 음지 양지, 천지 삑까리로 쌔빌맀다 지난주엔 쑥털털이를 쪄먹었고 어젠 씬냉이 나물을 무쳐 먹었다 나 귀가한 뒤 토끼도 봄나물 생각나 다녀갔는지 나생이밭에 동글동글 까만 똥이 깔렸다 봄날엔 나도 토끼도 반찬 걱정은 없다 오늘은 나생이국 대신 돈냉이 쪼리개 개울가 첫물 머구 몇 장이면 쌈밥도 거뜬하지 밥맛 타령하던 옆집 김씨 위해 달롱개도 한 줌 지는 해가 금싸라기 뿌려놓아 겨울초꽃들 더 노랗게 자지러지는 과수원 꽃밥 비법 알려준 미식가도 있지만 제비꽃 민들레, 그 어여쁜 꽃만은 차마 따지 못했다 나는 지금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그림 : 노숙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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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나뭇잎 꽃게시(詩)/배한봉 2014. 7. 19. 21:21
가을이면 나무는 동물성을 가진다 꾸물꾸물 바글바글 나무마다 지천인 꽃게 햇빛이 잘 익혀놓은 나뭇잎 꽃게 저것 봐라, 저도 애타는 한 생각이 불타오를 때는 팔랑팔랑 공중을 날아 하늘을 바다로, 구름을 은신처 모래펄로 삼는다 그러다가 땅에 내려와 기어 다닌다 바스락거리며 소소바람 파도에 몸 뒤집으며 붉은 영혼을 흘리는 식물성 꽃게 소녀들은 책갈피에 꽃게를 끼워두었다가 어른이 되면 추억이라는 꽃게해물탕을 끓여먹는다지 아프고 슬픈 날 그 나무 아래 묻어둔 편지를 꺼내 읽으며 처녀 때의 감성을 게살처럼 발라먹는다지 이쁜 집게발에 물리고 싶어 내가 쫓아다니던 꽃게는 어디 갔을까 한숨을 포옥 내쉬는 산국화 노란 꽃그늘 시린 밤 오기 전에 뜨겁고 붉은 생각을 새겨야겠다는 듯 분주하게 창천 바다에 뛰어드는 꽃게 워즈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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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그늘을 가진 사람시(詩)/배한봉 2014. 7. 12. 23:24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든다고 한다 고통의 위력은 쓸개 빠진 삶을 철들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한다 훌쩍 봄을 건너뛴 소만 한나절 양파를 뽑는 그의 손길에 툭툭, 삶도 뽑혀 수북히 쌓인다 둥글고, 붉은 빛깔의 매운 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확한 생각들이 둥글게, 둥굴게 굴러가는 묵시록의 양파밭. 많이 헤맸던 일생을 심어도 이젠 시퍼렇게 잘 자라겠다 외로움도 매운맛이 박혀야 알뿌리가 생기고 삶도 그 외로움 품을 줄 안다 마침내 그는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림 : 신경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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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버들피리시(詩)/배한봉 2014. 7. 12. 23:19
1. 동네 앞에 큰 시내가 흐르고, 시내를 따라 수양버들이 많았대서 유천(柳川)으로 불렸다는 내 고향 화천리(化川里)는 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앉은 평야마을. 낙동강 제방 축조 전에는 걸핏하면 물난리가 나서 지게에 무쇠솥 하나 둘러매고 뒷산으로 피난을 가곤 했대요. 그러면 방수림들이 일제히 피리소리로 울었더래요. 제 밑둥의 공동(空洞)으로 피리를 불며 몇 날 몇 밤을 우는 가장 오래된 수양버들 앞에 제(祭)를 올리면 그제서야 그 흐느낌이 잦아들더래요. 2. 벌논의 버들에 물이 오르면 형과 나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지요. 비틀어서는 수액 미끌미끌한 나무 알몸을 빼낸 뒤, 껍질 앞쪽을 이로 깨물면 씁쓰레한 버들물이 우리 볼우물에 괴어서 먼 산빛도 쑥물 들어 흘러내렸지요. 그렇게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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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 전지(剪枝)시(詩)/배한봉 2014. 5. 26. 19:44
복숭아나무 가지마다 꽃눈이 싱싱합니다. 복숭아나무는, 그악스런 눈바람 견디느라 좀 늙었지만 아직 힘이 팔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나는 얽히고설킨 가지를 자릅니다. 지치고 아픈 과거 시간을, 잘 보이지 않는 내 삶의 곁가지를 환한 봄볕에 잘라 말립니다. 고통의 능선 너머에 결실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속 만 가지 생각 중에 실한 열매가 되는 것은 한두 개도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지(剪枝) : 가지치기 (그림 : 류윤형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