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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한봉 - 버들피리
    시(詩)/배한봉 2014. 7. 12. 23:19



     1. 
    동네 앞에 큰 시내가 흐르고, 시내를 따라 수양버들이 많았대서 유천(柳川)으로 불렸다는 내 고향 화천리(化川里)는 산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앉은 평야마을. 낙동강 제방 축조 전에는 걸핏하면 물난리가 나서 지게에 무쇠솥 하나 둘러매고 뒷산으로 피난을 가곤 했대요. 그러면 방수림들이 일제히 피리소리로 울었더래요. 제 밑둥의 공동(空洞)으로 피리를 불며 몇 날 몇 밤을 우는 가장 오래된 수양버들 앞에 제(祭)를 올리면 그제서야 그 흐느낌이 잦아들더래요.
     

     2.
    벌논의 버들에 물이 오르면 형과 나는 새끼손가락 굵기의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들었지요. 비틀어서는 수액 미끌미끌한 나무 알몸을 빼낸 뒤, 껍질 앞쪽을 이로 깨물면 씁쓰레한 버들물이 우리 볼우물에 괴어서 먼 산빛도 쑥물 들어 흘러내렸지요. 그렇게 만든 버들피리를 불면 우리 몸에도 수액이 차오르고 마음의 가지에도 잎이 돋아 날마다 키가 자랐더랬어요.

    피리와 함께 초봄 한 달을 보내고 나면 벌판은 온통 뜸부기로 가득 차고, 내 피리소리는 뜸부기 울음따라 벌논을 건너 뛰고 또 건너 뛰고 온몸에 뻘칠을 한 채 귀가하곤 했지요. 방문 빼꼼히 열고 보던 창백한 얼굴의 작은 형은 혀를 끌끌 차면서도 내가 만들어 온 버들피리를 삑삑 불다가는 금세 숨이 차서 하늘만 바라보았구요, 나는 피리소리가 잘 안나서 그런가 싶어 다시 새 피리를 만들어 주곤 했더랬어요.

    동네 할배나무인 성황목 가지를 꺾어 피리를 만든 적이 없는데요, 그 근처의 버들가지를 함부로 꺾은 적도 없는데요, 밤하늘 새파란 별이, 우리 볼우물에 괴이던 씁쓰레한 버들물 같은 환한 샛별이 길 밖의 길로 뒷걸음질 칠 때, 형은 무심히도 그 샛별이 있던 자리로 가서는 영영 고요와 섞여 버리고 말대요.

    내 고향 화천리. 무쇠솥 하나 매고 뒷산으로 피난 가듯 객지로 나와 살며 생각하면, 우리 어릴 때 불던 버들피리, 뜸부기 울음 같던 피리장단이 지금도 속울음 붉은 세월을 서늘히 훓고 지나가지요. 그 옛날 제 몸에 구멍을 내어 피리로 울던 수양버들이 이제는 내 몸 안에 뿌리박아 소리도 참 크게 울리고 있지요.

    화천리 : 경남 함안군 칠북면 화천리

    (그림 : 강만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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