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문효치
-
문효치 - 절 풍경시(詩)/문효치 2014. 9. 23. 23:49
빈 마당엔 옷 벗은 백일홍나무 겨드랑이 밑으로 지나가는 세월이 갈지러워 용틀임하고 있다. 당간 꼭대기에 걸린 흰 구름 한 장 펄럭이다 헤어지고 졸음에 감기운 여승의 독경소리에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비스듬히 기대어 잠드는데 부처님은 긴 가부좌 헐고 법당에 나와 산죽 잎사귀에 배어 지위지지 안은 어젯밤 달빛에 눈맞추고 계신다. 대웅전 팔작지붕 위 동박새 한 마리 주문진 앞바다에서 막 걸어온 푸른 물감 하늘에 허부어 색칠하는데 행여 검은 그림자 이 평화 깨뜨릴까 두려워 나는 바삐 절문을 나선다 (그림 : 조규석화백)
-
문효치 - 봉평의 달시(詩)/문효치 2014. 9. 23. 23:45
1 달빛 위에 올라서서 바람 한 조각 둥글게 오려 꼿꼿한 대나무 막대로 굴렁쇠 굴려 그 맑디맑은 눈 속에 풍덩 빠져드네 나귀 등에 실려 메밀꽃 서러운 색깔은 멀리 가고 물오른 달만 바지 속으로 스며드네. 2. 물은 등불 밑에서 메밀꽃 같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밤나무 위에는 거친 사내의 욕망이 비릿하게 피어나고 물방앗간에 고여 술처럼 익어가던 바람 서너 말 이리로 뜨겁게 불어왔다. 봉평의 달을 와락 끌어안고 칙칙한 당근밭으로 뛰어들었다. 3. 버덩말을 지나다가 가로수에 걸려 있는 달빛 하나 주웠다. 구겨지긴 했지만 돌 위에 올려놓고 잘 펴서 손질하면 그래, 허생원의 나귀 등에 얹혀 가던 그 빛깔 다시 빛나 냇가로 내려가 찬물에 뽀득뽀득 씻었다. 펴 놓고 편지를 썼다. 그대는 '아픔' 달콤한 '아픔'이라..
-
문효치 - 꿈속의 강변시(詩)/문효치 2014. 9. 23. 23:34
아무도 보이지 않는 널따란 대낮이었다. 소년은 강바람 속에서 머리칼을 날리며 어린 꿈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만경강 어구 뻘밭에 무성한 정숙을 쪼개내어 툼벙퉁벙 강물에 던지고 있었다. 무릎에 차오르는 밀물에 문득 짧아진 하루를 법으로 만나며 기어오르는 강둑으로 미류나무는 다가와 있었다. 하늘 한가운데 쯤 까치집을 틀며 소년의 풋풋한 꿈을 품고 있는 나무는 눈부신 푸르름 속을 수많은 팔을 뻗어 저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 초가집 마을은 굴뚝에 길다란 깃발을 늘어뜨리며 안개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언덕 밭을 올라가는 옥수수는 수염이 하얗게 세고 소년의 꿈은 옥수수 알갱이 속에서도 톡톡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림: 이황 화백)
-
문효치 - 바다의 문 6시(詩)/문효치 2014. 9. 23. 23:09
내소사 대숲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오늘은 한 가마니 지고 와야겠다. 저리도 쓸쓸하게 돌아앉아 울음 훌쩍거리고 있는 저 놈 무인도를 위해. 썰물 따라 물소리 멀리 가고 남는 것은 갯벌에 부우옇게 번져가는 외로움. 어서 내소사 대숲 찬 기운에 영근 푸른 달빛을 한 동이 이고 와야겠다. 내가 바칠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어리석은 사랑, 처음부터 아예 되지도 않을 일. 앓는 가슴이나 되풀이 되풀이 쓰다듬으며 저 놈 무인도 옆에 지켜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림: 안영목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