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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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밤 노래시(詩)/마종기 2013. 12. 23. 11:2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바람 부는 언덕에서, 어두운 물가에서 어깨를 비비며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 마른 산골에서는 밤마다 늑대들 울어도 쓰러졌다가도 같이 일어나 먼지를 터는 것이 어디 우리나라의 갈대들뿐이랴. 멀리 있으면 당신은 희고 푸르게 보이고 가까이 있으면 슬프게 보인다. 산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오르는 몇 개의 구름, 밤에는 단순한 물기가 되어 베개를 적시는 구름, 떠돌던 것은 모두 주눅이 들어 비가 되어 내리고 내가 살던 먼 갈대밭에서 비를 맞는 당신, 한밤의 어두움도 내 어리석음 가려주지 않는다 (그림 : 김명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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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우화의 강시(詩)/마종기 2013. 12. 23. 11:19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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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시(詩)/마종기 2013. 12. 23. 11:13
오랫동안 별을 싫어했다. 내가 멀리 떨어져 살고 있기 때문인지 너무나 멀리 있는 현실의 바깥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안쓰러움이 싫었다 외로워 보이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난 여름 북부 산맥의 높은 한밤에 만난 별들은 밝고 크고 수려했다 손이 담길 것같이 가까운 은하수 속에서 편안히 누워 잠자고 있는 맑은 별들의 숨소리도 정다웠다 사람만이 얼굴을 들어 하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옛날에는 아무데서나 별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요즈음, 사람들은 더 이상 별을 믿지 않고 희망에서도 등을 돌리고 산다 그 여름 얼마 동안 밤새껏, 착하고 신기한 별밭을 보다가 나는 문득 돌아가신 내 아버지와 죽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반가운 이야기를 나누기 했다 사랑하는 이여 세상의 모든 모순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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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익숙지 않다시(詩)/마종기 2013. 12. 23. 11:12
그렇다. 나는 아직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익숙지 않다. 강물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눈빛을 열고 매일 밝힌다지만 시들어가는 날은 고개 숙인 채 길 잃고 헤매기만 하느니. 가난한 마음이란 어떤 삶인지, 따뜻한 삶이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두 익숙지 않다. 죽어가는 친구의 울음도 전혀 익숙지 않다. 친구의 재 가루를 뿌리는 침몰하는 내 육신의 아픔도, 눈물도, 외진 곳의 이명도 익숙지 않다. 어느 빈 땅에 벗고 나서야 세상의 만사가 환히 보이고 웃고 포기하는 일이 편안해질까 (그림 : 이경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