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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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과수원에서시(詩)/마종기 2013. 12. 23. 11:10
시끄럽고 뜨거운 한 철을 보내고 뒤돌아본 결실의 과수원에서 사과나무 한 그루가 내게 말했다. 오랜 세월 지나가도 그 목소리는 내 귀에 깊이 남아 자주 생각난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땅은 내게 많은 것을 그냥 주었다. 봄에는 젊고 싱싱하게 힘을 주었고 여름에는 엄청난 꽃과 향기의 춤. 밤낮없는 환상의 축제를 즐겼다. 이제 가지에 달린 열매를 너에게 준다.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 땅에서, 하늘에서, 주위의 모두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그냥 받았다. 내 몸의 열매를 다 너에게 주어 내가 다시 가난하고 가벼워지면 미미하고 귀한 사연도 밝게 보이겠지. 그 감격이 내 몸을 맑게 씻어주겠지. 열매는 음식이 되고, 남은 씨 땅에 지면 수많은 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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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깨꽃시(詩)/마종기 2013. 12. 23. 11:09
헤어져 살던 깨알들이 땅에 묻혀 자면서 향긋한 깻잎을 만들어내고, 많은 깻잎 속에 언제 작고 예쁜 흰 깨꽃을 안개같이 뽀얗게 피워놓고, 그 깨꽃 다 보기도 전에 녹녹한 깨알을 한 움큼씩 만들어 달아주는 땅이여. 깨알씨가 무슨 흥정을 했기에 당신은 이렇게 농밀하고 풍성한 몸을 주는가. 그런가 하면, 흐려지는 내 눈에는 잘 보이지도 않는 꽃씨가, 어떻게 이 뒤뜰에 눈빛 환해지는 붉은 꽃, 보라색 꽃의 연하고 가는 몸을 만드는가. 땅의 염료 공장은 어디쯤 있고 봉제 공장은 어디쯤에 있고 향료공장은 또 어디쯤에 있기에, 흰 바탕에 분홍 띠 엷게 두른 이 작은 꽃이 여기서 피어 웃고 있는가. 나이 들수록 남들이 다 당연하다 여기며 지나치는 일들이 내게는 점점 더 당연하지 않게 보이는 것은 내 분별력이 흐려져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