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마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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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추운 날의 질문시(詩)/마종기 2022. 2. 17. 23:24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겨울바람에 피부가 터진 말채나무가 대답도 없이 웃는다. 꿈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환갑 넘은 바람 몇 개가 일어나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게으른 열매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며 낮은 하늘을 흔들어댄다. 이 추위를 보내면 한 세월이 가고 하얀 말채나무 꽃이 온몸을 덮는다니 그때면 내 뻣속에 감추었던 우수의 철책 거두고 정처 없던 긴 여행을 마무리해야지. 늙은 새 한 마리가 날갯짓 멈추고 얼어버린 하늘을 겨우 넘어가는가, 하늘이 늙은 새를 안아주고 있는가. 그러면 나는 이제 누구인가. 완전하다는 것도 분명하다는 것도 빈 말채나무에서는 보이지 않고 맑고 푸르른 유혹의 발걸음이 겨울이 끝나는 날처럼 따뜻하구나.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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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이사시(詩)/마종기 2020. 10. 15. 18:24
한동안 펼쳐보지 않았던 오래된 책이 반갑다며 내게 안긴다. 아직도 체온을 가진 종이. 나만 나이 든 줄 알았더니 책도 늙는구나. 눈에 익은 것은 모두 잊지않고 나이를 보인다. 책을 털고 펼치니 보이지 않던 먼지가 날린다. 무심결에 꾸미며 산다고 감추어두었든 날들이 깨어나 먼지를 날리는 내 어깨. (그래, 무관심이 제일 힘들었지.)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에 기억의 줄은 느슨해지고 비어 있는 시간의 틈새.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내가 버리고 온 말들은 오늘 밤 잠이나 깊이 들까. (그림 : 정창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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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아내의 꽃시(詩)/마종기 2019. 2. 27. 19:39
어떤 나무는 크고 탐스러운 꽃을 만들고, 어떤 꽃나무는 꽃잎의 색깔에 관심이 많아 힘찬 기운의 원색이나 드문 색깔의 조화를 수놓아 한 개의 꽃만으로도 눈이 부신데, 어떤 꽃나무는 간직할 향기에만 전념해 지나가는 길목에서도 언뜻 황홀하게 만나는 꽃 향. 그런데 어떤 꽃은 듬직한 나무도 거느리지 못한 채 살아있는 것만도 기쁜 듯 크기도 색깔도 향기도 별로 없이 맨날 혼자 웃으며 흔들거리네. 그런 꽃들을 보면 편안해지고 만만해지고 따뜻해지고 느긋해져서 어깨가 다 가벼워지는데, 그래서 아마도 아내의 꽃이 아닐까 하니 그 힘든 순명이 자기 민얼굴이라며 은근한 꽃의 손으로 나를 안아주네. (그림 : 김영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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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이슬의 애인시(詩)/마종기 2018. 7. 11. 11:02
아침마다 이슬은 나를 허물어 질투를 선물한다. 그런 날들이 들에 쌓여 시든 삶을 사는 마을, 모든 빛나고 아름다운 것들은 평생의 속임수가 되어 사방에서 반짝였다. 이른 아침의 작은 꽃은 결국 잠들어 있던 이슬이었지만 그래도 꽃향기는 몰려와 눈부신 하루를 만들고 시간의 폐허에서 나를 구해주었다. 간밤에는 누가 한을 남겼나, 이슬이 풀잎마다 가득하다. 그 여리고 가는 마음을 사랑하느니 야속하게 다시 배신당할지라도 나는 한 세상의 헐벗은 애인, 잊혀진 그 하루의 동행만으로도 온몸을 적시던 이슬의 춤. (그림 : 최장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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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다섯 번째 맛시(詩)/마종기 2018. 2. 27. 17:58
혀끝의 매운맛은, 정작 아픈 맛이라는 말에 아픈 것에도 맛이 있다는 게 좀 이상하게 들렸는데, 그럼 단맛은 간지러움의 맛이고 신맛은 미움의 맛일까. 절망도 행복도 맛이 있다는 것, 더운 것이나 추운 것도 혀에게는 맛으로만 느껴진다는데 내게 오는 매일의 텅 빈 맛은 어디서 만날 어려운 하루일까. 빈 맛은 나이 탓만이 아니리. 손금에 자세히 만져지는 깊은 물길, 간절한 슬픔의 맛은 왜 따뜻할까. 하늘을 헤집고 내게 오는 친구여, 두 눈에 맺히는 소중한 맛이여. (그림 : 황재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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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가을, 아득한시(詩)/마종기 2017. 10. 26. 11:09
야 정말, 잎 다 날린 연한 가지들 주인 없는 감나무에 등불 만 개 밝히고 대낮부터 취해서 빈 하늘로 피어오르는 화가 마티스의 감빛 누드, 선정의 살결이 그 옆에서 얼뜬 미소로 진언을 외우는 관촉사 은진미륵, 많이 늙으신 형님. 야 정말, 잠시 은근히 만져보기도 전에 다리 힘 다 빠져 곱게 눕는 작은 꽃, 꽃잎과 씨도 못 가린 채 날아가버리지만 죽은 풀, 시든 꽃까지, 잡초 씨까지 모두 모아 뜨거운 다비(다비)에 부처 사리나 찾아보고 연기 냄새 가볍게 품고 꽃을 떠날밖에. 저 산에 흥청이는 짙은 단풍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일상은 너무 단순하다. 산 너머 저 쪽빛 바다에 비하면 옳다, 우리들의 쪽배는 너무나 작다. 그러니 살아온 평생은 운명일밖에. 눈을 뜬 육신의 마주침도 팔자일밖에. 멀고 가까움, 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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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변명시(詩)/마종기 2017. 2. 7. 12:08
흐르는 물은 외롭지 않은 줄 알았다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들며 예식의 춤과 노래로 빛나던 물길, 사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다지만 가볍게 보아온 세상의 흐름과 가버림 오늘에야 내가 물이 되어 물의 얼굴을 보게 되나니 그러나 흐르는 물만으로는 다 대답할 수 없구나 엉뚱한 도시의 한쪽을 가로질러 길 이름도 방향도 모르는 채 흘러가느니 헤어지고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우리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마음도 알 것 같으다 밤새 깨어 있는 물의 신호등, 끝내지 않는 물의 말소리도 알 것 같으다 (그림 : 강민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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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종기 - 신설동 밤길시(詩)/마종기 2016. 4. 21. 17:23
약속한 술집을 찾아가던 늦은 저녁, 신설동 개천을 끼고도 얼마나 어둡던지 가로등 하나 없어 동행은 무섭다는데 내게는 왜 정겹고 편하기만 하던지. 실컷 배웠던 의학은 학문이 아니었고 사람의 신음 사이로 열심히 배어드는 일, 그 어두움 안으로 스며드는 일이었지. 스며들다가 내가 젖어버린 먼 길. 젖어버린 나이여, 숨결이여, 그래도 꺾이지 않았던 날들은 모여 꽃이나 열매로 이름을 새기리니 이 밤길이 내 끝이라도 좋겠다. 거칠고 메마른 발바닥의 상처는 말수가 줄어든 자책의 껍질들, 병든 나그네의 발에 의지해 걸어도 개울물 소리는 더이상 따라오지 않는다. 오늘은 추위마저 안심하고 깊어지는 구수한 밤의 눈동자가 빛난다. 편안한 말과 얼굴이 섞여 하나가 되는 저 불빛이 우리들의 술집이겠지. 온 몸과 정성을 다해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