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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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가까운 듯, 먼 듯시(詩)/나호열 2017. 12. 6. 23:37
어제는 눈 내리고 오늘은 바람이 몹시 불었다고 내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나지막한 음성에 놀라 창 밖을 보니 백운대 인수봉이 가까이 와 있다 늘 마주하는 이웃이지만 언제나 찾아가는 일은 나의 몫 한 구비 돌아야 또 한 구비 보여주는 생은 힘들게 아름다워 휘청거리는 그림자에 등 내밀어주는 침묵 뿐이더니 곧게 자란 몇 그루 소나무 위의 잔설을 털며 몇 년 묵었어도 아직 향기 은은한 작설 잎을 구름에 씻어낸다 멀리 떨어져야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 한 걸음에 다가가면 홀연히 모습 감추는 사람 혹시, 하고 물어보니 눈보라 헤치며 홀연히 자리를 뜬다 간 밤의 긴 갈증 머리 맡에 냉수 한 사발은 그대로인데 (그림 : 이상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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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모시 한 필시(詩)/나호열 2017. 8. 4. 18:16
모시 한 필 속에는 서해바다 들고 나는 바람이 금강을 타고 오르는 여름이 있다 키만큼 자란 모시풀을 베고 삼 개월을 지나는 동안 아홉 번의 끈질긴 손길을 주고받는 아낙네들의 거친 숨소리가 베틀에 얽히는 것을 슬그머니 두레의 따스한 마음도 따라 얹힌다 모시 한 필 속에는 서천의 나지막한 순한 하늘이 숨어 있고 우리네 어머니의 감춰진 눈물과 땀방울이 하얗게 물들어 있다 구름 한 조각보다 가볍고 바람 한 줄보다 팽팽한 세모시 한 필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묵언의 편지 곱디 고와 아직도 펼쳐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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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선물시(詩)/나호열 2017. 7. 24. 22:21
배운 것 없고 아는 것 없어 바다에 절하며 살았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바다는 아무 말 없이 미역도 내어주고 파래도 톳도 던져주었다 오래전 서방님을 삼켜버린 바다 수평선에 걸어놓은 그리움마냥 마르고 딱딱해진 선물은 누가 준 것인가 머리를 짓누르는 생계를 이고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어갔다 되돌아오니 육십 년이 돌았네 얼굴에 깊이 패인 이 주름살이 그 흔적이야 절룩이는 발자국이야 오늘도 바다에 절을 하며 손에 미역 몇 줄기 받아든 부르는 사람없어 이름 오래 전 잊어버린 할머니 세월에 빛바랜 꽃잎 같은 웃음이어도 얼굴에 환하기로 으뜸이다 어둡고 험한 밤길을 걷다가 문득 내 가슴에서 피어나는 그 꽃 (그림 : 채기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