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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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종점의 추억시(詩)/나호열 2016. 7. 28. 09:41
가끔은 종점을 막장으로 읽기도 하지만 나에게 종점은 밖으로 미는 문이었다 자정 가까이 쿨럭거리며 기침 토하듯 취객을 내려놓을 때 끝내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귀잠 들지 못하고 움츠려 서서 질긴 어둠을 씹으며 새벽을 기다리는 버스는 늘 즐거운 꿈을 선사해 주었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얼마나 큰 설렘인가 서강행(西江行) 이름표를 단 버스는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유년을 떠나갔지만 서강은 출렁거리며 내 숨결을 돋우었다 그곳에 가면 아버지를 만날까 이윽고 내가 서강에 닿았을 때 그곳 또한 종점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내 몸에 잠들어 있던 아버지가 새살처럼 돋아 올랐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말한다 이 세상에 종점은 없다. (그림 : 성연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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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산다는 것시(詩)/나호열 2016. 3. 15. 17:42
집으로 돌아가는 촌로 부부를 태웠다. 직업이 뭐요? 학교에서 학생들 가르칩니다. 아!, 그거 좋지, 난 배우는 사람이요, 땡감만 열려 매년 골탕 먹이는 감나무한테, 삽질, 쇠스랑질에 돌만 솟아오르는 땅 한테, 제멋대로 비 뿌리고 제멋대로 비 거두어 가는 하늘에...... 옆에서 할머니가 거들었다. 소득 없는 일에 저렇게 매달리는 법만 평생 배워야 소용없소, 거두어들일 줄 알아야지. 논둑에 깨가 한창이었다. 아, 저 깨들 좀 봐, 정말 잘 영글었네, 내 새끼들 같다니까. 올해 깨 심었는데 내 눈에는 깨 밖에 안 보여, 온통 깨 밖에 없다니까, 말 못하는 저것들도 사람 정성은 알지, 마음 좋게, 편하게 정성을 다하면 보답을 한다니까, 아! 저 영근 깨들 좀 봐요, 저 주인네 참 실한 사람이겠구먼 산소 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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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어머니를 걸어 은행나무에 닿다시(詩)/나호열 2016. 2. 26. 22:04
구 백 걸음 걸어 멈추는 곳 은행나무 줄 지어 푸른 잎 틔워내고 한여름 폭포처럼 매미 울음 쏟아내고 가을 깊어가자 냄새나는 눈물방울들과 쓸어도 쓸어도 살아온 날보다 더 많은 편지를 가슴에서 뜯어내더니 한 차례 눈 내리고 고요해진 뼈를 드러낸 은행나무 길 구 백 걸음 오가는 사람 띄엄한 밤길을 걸어 오늘은 찹쌀 떡 두 개 주머니에 넣고 저 혼자 껌벅거리는 신호등 앞에 선다 배워도 모자라는 공부 때문에 지은 죄가 많아 때로는 무량하게 기대고 싶어 구 백 걸음 걸어 가 닿는 곳 떡 하나는 내가 먹고 너 배고프지 하며 먹다 만 떡 내밀 때 그예 목이 메어 냉수 한 사발 들이켜고 마는 나에게는 학교이며 고해소이며 절간인 나의 어머니 (그림 : 서정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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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 긴 편지시(詩)/나호열 2014. 6. 6. 12:45
풍경(風磬)을 걸었습니다 눈물이 깨어지는 소리를 듣고 싶었거든요 너무 높이 매달아도 너무 낮게 내려놓아도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에 우두커니 오래 있다가 이윽고 아주 오랜 해후처럼 부등켜 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와르르 눈물이 깨질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씨앗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날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손금 속으로 사라지는 짧은 그림자 말이지요 너무 서두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조금씩 솟아올라 고이는 샘물처럼 풍경도 슬픔을 제 안에 채워두어야겠지요 바람을 알아버린 탓이겠지요 (그림 : 이장옥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