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고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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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달의 뒷면을 보다 (바래길 연가·섬노래길)시(詩)/고두현 2015. 10. 30. 21:26
송정 솔바람해변 지나 설리 해안 구비 도는데 벌써 해가 저물었다 어두운 바다 너울거리는 물결 위로 별이 하나 떨어지고 돌이 홀로 빛나고 그 속에서 또 한 별이 떴다 지는 동안 반짝이는 삼단 머리 빗으며 네가 저녁 수평선 위로 돛배를 띄우는구나 밤의 문을 여는 건 등불만이 아니네 별에서 왔다가 별로 돌아간 사람들이 그토록 머물고 싶어 했던 이곳 처음부터 우리 귀 기울이고 함께 듣고 싶었던 그 말 한때 밤이었던 꽃의 씨앗들이 드디어 문 밖에서 열쇠를 꺼내 드는 풍경 목이 긴 호리병 속에서 수천 년 기다린 것이 지붕 위로 잠깐 솟았다 사라지던 것이 푸른 밤 별똥별 무리처럼 빛나는 것이 오, 은하의 물결에서 막 솟아오르는 너의 눈부신 뒷모습이라니! 송정 솔바람해변 : 경남 남해군 미조면 송정리 1124번지 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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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그 숲에 집 한 채 있네 (물건방조어부림 2)시(詩)/고두현 2015. 10. 30. 21:19
그 숲 그늘 논밭 가운데 작은 집 하나 방학 때마다 귀가하던 나의 집 중학 마치고 공부 떠나자 머리 깎고 스님 된 어머니의 암자 논둑길 겅중 뛰며 마당에 들어서다 꾸벅할까 합장할까 망설이던 절집 선잠 결 돌아눕다 어머니라 불렀다가 아니, 스님이라 불렀다가 간간이 베갯머리 몽돌밭 자갈 소리 잘브락대는 파도 소리 귀에 따숩던 그 집에 와 다시 듣는 방풍림 나무 소리 부드럽게 숲 흔드는 바람 소리 풍경 소리. 먼 바다 기억 속을 밤새워 달려와선 그리운 밥상으로 새벽잠 깨워 주던 후박나무 잎사귀 비 내리는 소리까지 오래도록 마주 앉아 함께 듣던 저 물소리. 물건방조어부림 : 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에 있는 방조어부림. 면적 2만 3,397㎡. 천연기념물 제150호. 어부림이란 본디 어군(魚群)을 유도할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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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집 짓기시(詩)/고두현 2014. 9. 24. 23:47
뒹구는 것이 어디 슬픔뿐이랴, 내가 흙이 되어 무심한 바람 따라 흩날리고 밟히다가 진실로 낮은 곳 골라 허리 바로 세우면 한 세상 밝게 비출 집 집 한 채로 빛나는 것을, 그대 내 몸 속 잘디잔 뼈, 떼 뿌리 엉긴 살점까지 물 받아 거푸집에 섞으면서 어둠 먼저 담을 치고 빈 터에 기둥 하나 밀어올린다는 것이 그렇구나, 떠도는 자갈들도 함께 일어나 몸 부비고 소금 땀 쓰리던 관절 마디마디 따뜻해져 그리움, 콧등 찡하게 물무늬지는데 젖은 흙 더욱 찰지게 다지며 목반자 먼 끝으로 하늘색 지붕 올릴 때 막막한 겨울 추위 목놓아 울음 울던 바람벽도 찬찬히 묶어 댓돌 반짝거리게 닦다 보면 못다한 말뿐이랴 걱정 많던 그날의 사랑 출렁거리며 다시 돌아와 겹격자 멋 낸 창틀 슬픔으로 색칠하는 저 흰빛, 신새벽 찬 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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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사랑니시(詩)/고두현 2014. 9. 24. 23:45
슬픔도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세상 너무 환하고 기다림 속절없어 이제 더는 못 참겠네 온몸 붉디붉게 애만 타다가 그리운 옷가지들은 모두 다 벗고 하얗게 뼈가 되어 그대에게로 가네 생애 가장 단단한 모습으로 그대 빈 곳 비집고 서면 미나리밭 논둑길 가득 펄럭이던 봄볕 어지러워라 철마다 잇몸 속에서 가슴 치던 그 슬픔들 오래되면 힘이 되는지 내게 남은 마지막 희망 빛나는 뼈로 솟아 한밤내 그대 안에서 꿈같은 몸살 앓다가 끝내는 뿌리째 사정없이 뽑히리라는 것 내 알지만 햇살 너무 따뜻하고 장다리꽃 저리 눈부셔 이제 더는 말문 못 참고 나 그대에게로 가네 (그림 : 박용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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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물메기국시(詩)/고두현 2014. 8. 27. 23:44
정독도서관 회화나무 가지 끝에 까치집 하나 삼십년 전에도 그랬지 남해 금산 보리암 아래 토담집 까치둥지 어머니는 일하러 가고 집에 남은 아버지 물메기국 끓이셨지 겨우내 몸 말린 메기들 꼬득꼬득 맛 좋지만 밍밍한 껍질이 싫어 오물오물 눈치 보다 그릇 아래 슬그머니 뱉어 놓곤 했는데 잠깐씩 한눈 팔 때 깜쪽같이 없어졌지 야들아 어른 되면 껍질이 더 좋단다 맑은 물에 통무 한 쪽 속 다 비치는 국그릇 헹구며 평생 겉돌다 온 메기 껍질처럼 몸보다 마음 더 불편했을 아버지 숟가락 사이로 먼 바다 소리 왔다 가고 늦은 점심 두레밥상 빈 둥지 올려다보며 껍질 몰래 삼키던 그 모습에 목이 메던 풍경이 있었네 해질녘까지 그 자리 지켜봤을 까치집 때문인가, 정독도서관 앞길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여름 한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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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 산감나무시(詩)/고두현 2014. 6. 16. 11:53
얼룩무늬 산감나무 아래 오래 서 있었네. 얼룩 없는 삶 있을까만 옷 바꿔 입고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다 보면, 아는가 나도 한 그루 산감나무가 될지 날 저물고 모두 하산한 뒤에도 꿈쩍 않고 그 자리 지키는 산감나무 세상의 모든 상처, 고약 같은 까치밥 한 알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진 그것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온몸 뒤틀며 혼자 견딘 것이 흉터에 새살 밀어올리는 그것 얼룩의 힘이라니 여태까지 나를 키운 것도 까치밥이었구나. 누덕진 옷 벗어주고 알몸으로 퍼렇게 멍까지 든 너를 두고 그래 나 혼자 흔들바위 아래에서 너무 오래 쉬었구나. (그림 : 이창효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