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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리 - 안식이 온다면
    시(詩)/시(詩) 2022. 12. 15. 15:03

     

    두물머리에서 우리는

    희망에 대해 말한 적이 있지

     

    어서 시간이 다 지났으면 좋겠어요

    아픈 몸도 다 나아서

    조만간 주말마다 등산을 할 수 있을 테고

    쉬운 산부터 차근차근 올라 손을 맞잡고 꽃구경 나무구경

    개울 흐르는 소리 산새 지저귀는 소리 다람쥐가 돌무더기 틈에서 부드러운 꼬리를 쓸어내리는 소리

    다 들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정말 무엇이든 할 텐데

     

    잃어버렸던 사탕 봉지를 찾은 기쁨,

    그러니까 시간은 입속에서 굴릴 때만 아주 달콤하고

    사라지고 나면 계속 찾게 되지

     

    이곳으로 모여드는 가족과 친구와 연인이 무척 아름답다

    우리가 진짜 결혼할 수 있을까?

    집을 갖고 돈을 모으고 예쁜 동네 카페를 찾아다니고

    아이를

    우리가 죽고 없는 세상도 차분하게 살아갈 수 있을 사랑을

    낳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충분한 자격이 주어졌을까?

     

    물과 물이 흘러내려서 만난대

    옛날에는 나루터로도 쓰였고

    이른 아침에 피어나는 물안개와 설경과 일몰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워서

    다들 고백하고 기념하고 간직하려는 거야

    눈부시도록 후회해서

    저 느티나무가 4백 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야

     

    커피 다 마셨으니 핫도그나 먹을까

    케첩과 머스터드소스를 골고루 뿌려줄게

    그사이 바람이 훅 불어닥치면

    수양버들이 너머의 산자락을 빗어주었지

    움직임을 멈추면 꼭 어디선가 내리고 있던 비의 일부를 훔쳐온 것 같아

    있는 그대로 다시 폭우의 세계에게 되돌려주고 싶다고도 말했지

     

    우리가 원하는 만큼 시간은 다 흐르고 만 걸까?

    지금부터 희망을 다시 말해보아도 좋을까?

    그러나 반지를 끼워줄 손은 어디에 있지?

    동호회 아주머니들을 보며 나도 나중에 나이 들면

    자전거 타면서 풍경 사진 찍고 싶다고 그렇게 살고 샆다고 

    미소를 짓던

    옆모습은 어디로 갔지?

     

    오랜만에 다시 온 이곳에선 여전히 물과 물이 만나

    시간과 시간이 만나는 곳을 천국이라고 부르겠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피안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따라 죽었어야 했는데

     

    놀랍도록 희디흰 숨은 생생하게 흩어져

    연잎 위로 내려앉네

    그런 숨들이 여긴 가득해, 우리가 되지 못해서

    태풍을 기다려 차라리 쓸려버리고 싶은

     

    그곳에서 폭우의 세계를 찾았니

    비를 돌려주었니

     

    이곳의 너머가 그곳이라면

    희망이 이미 달아나는 중인 건가?

    어차피 못 잡을 걸 알면서 뭐 하러 부르고 재촉하지?

    이 많은 가족과 친구와 연인은

    어떤 확신이 있길래 저마다 한 손에 약속을 쥐고 있지?

     

    물안개가 가리고 싶어 하는 아침 속에는

    얼마나 많은 마음이 부서졌지?

    (그림 : 서경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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