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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실을 들고 지나갔다
한 손에 든 실뭉치에서 실을 살살 풀면서
어딘가로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 끝에다 실을 묶어둔 것인지
어디부터 걸어온 것인지
실은 한 방향으로 길게 길게 풀려나가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사람들은
실을 밟기도
실에 감기기도 했다
어느 길 중간에서 실에 걸린 사람들은
그 실을 끊으려고도 했지만
절대 그렇게는 끊어지지 않았다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실이 공중으로 들어올려지는가 싶어
눈으로 실을 따라가보는데
저멀리로 커다란 연이 떠오르는 게 보였다
인생에 실 하나를 묶어둔다면
인생 어느 귀퉁이에다 실을 묶어두고
어딘가로 어딘가로 마냥 길을 잃어도 되는 거라면
(그림 : 강정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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