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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병률 - 애인
    시(詩)/이병률 2020. 11. 7. 16:18

     

    봉투 하나가 배달되었고

    나는 감염되었다

     

    몇 번쯤 봉투가 배달되었을까

     

    봉투를 여는 순간

    한 세계가 끝이 나고

    한 세계가 닫히는 걸 알았다

     

    상상한 대로 봉투 안에는 열쇠가 들어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그 사람이 안내했고

    그곳에서 지내며 내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알려주었다

    열쇠가 이것 하나냐고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갔을까

    나와는 상관없던 사람

    한철의 주인이었다

     

    요란하게 한숨은 쉬지만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던 사람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도 되냐고 물었던 사람은

    인생의 어디쯤을 떠나고 있을까

    어디쯤에서 맨발이 되어 발소리를 죽이고 있을까

     

    올해의 일월 일일로 돌아가자고 했다

    몇 달 전하고도 비슷한 계절이 지속되었건만

    그래도 그 사람은 같이 돌아가자 했다

     

    못 알아듣는 척했던 그 말과 거래할 때마다

    나는 깊이 가라앉았다

    차라리 그 말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을까

     

    흘낏 보기만 했는데도

    그 사람의 안주머니에 빈 봉투가 많았던 것이 자꾸 생각났다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이 그렇듯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

    주인은 어디 갔을까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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