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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 하나가 배달되었고
나는 감염되었다
몇 번쯤 봉투가 배달되었을까
봉투를 여는 순간
한 세계가 끝이 나고
한 세계가 닫히는 걸 알았다
상상한 대로 봉투 안에는 열쇠가 들어 있었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 그 사람이 안내했고
그곳에서 지내며 내가 지녀야 할 태도에 대해 알려주었다
열쇠가 이것 하나냐고 내가 물었다
그 사람은 어디 갔을까
나와는 상관없던 사람
한철의 주인이었다
요란하게 한숨은 쉬지만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던 사람
길게 자란 머리를 잘라도 되냐고 물었던 사람은
인생의 어디쯤을 떠나고 있을까
어디쯤에서 맨발이 되어 발소리를 죽이고 있을까
올해의 일월 일일로 돌아가자고 했다
몇 달 전하고도 비슷한 계절이 지속되었건만
그래도 그 사람은 같이 돌아가자 했다
못 알아듣는 척했던 그 말과 거래할 때마다
나는 깊이 가라앉았다
차라리 그 말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을까
흘낏 보기만 했는데도
그 사람의 안주머니에 빈 봉투가 많았던 것이 자꾸 생각났다
그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이 그렇듯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
주인은 어디 갔을까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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