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가림 - 풀잎 가족시(詩)/이가림 2019. 8. 21. 09:08
느닷없이
바람이 세게 불어오면
애비 풀잎은
휘어진 허리를 곧추세워
"얘들아, 잠깐만 엎드려라
얘들아, 잠깐만 엎드려라"고
고래고래 고함치다가
뿌리를 허옇게 드러내면서
쓰러진다.
하지만 애비 풀잎이
뒤집힌 뿌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풀잎 가족은
일제히 어깨동무를 한다.
비 오는 날이면
새끼 풀잎들은 모두
벌판으로 몰려 나가
얼굴 때리는 물방울이 좋아
하늘을 향해
깡총깡총 튀어 오른다.
그 어린 것들 옆에서
애비 풀잎도
애미 풀잎도
덩달아 어깨춤을 춘다.
새끼들 중 누가 몸살이라도 나면
함께 끙끙 앓으며
밤새 뜬눈으로 밤을 세운다.
푸른 여름밤
별의 눈동자 초롱초롱 빛날 때면
풀잎 가족의 눈가에도
방울 방울 방울
투명한 이슬이 돋아
새벽까지
은하수 같은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는다.
(그림 : 신미란 화백)
'시(詩) > 이가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가림 - 귀가, 내 가장 먼 여행 2 (0) 2019.08.21 이가림 - 수차(水車) 위의 생 (0) 2019.08.21 이가림 - 잊혀질 권리 (0) 2019.01.28 이가림 - 로프공의 하루 (0) 2018.05.29 이가림 - 깨어진 거울 (0) 2015.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