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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든지 나를 늘려보세요
당신이 늘 주저 없이 빠져들었던 깊이에서
한 뼘 더 들어가도 괜찮아요
당신의 뜨거운 체온이 밀어준다면
목덜미까지 물이 차올라도 견딜 수 있어요
누군가는 내 거죽이
물이나 흙의 곁에 알맞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불끈 솟아나는
수많은 혈관의 곁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졌지요
당신의 혈관이 휘청거리는 나를 멈추게 하고
지루해 할 겨를 없이 또 한걸음 물속을, 그 깜깜함을
기꺼이 건너가게 해요
그러니 얼마든지 나를 늘려보세요
어느덧 늙은 당신을 닮아
늘어났다 다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
한참 더뎌졌지만
오늘 나는 당신이 가자는 대로 가서
저물녘에 돌아오고 싶어요
저물녘, 젖은 담벼락 아래
당신의 체온을 모조리 쏟아내어
당신이 키우는 여린 것들을
나도 덩달아 살려내고 싶어요
(그림 : 박석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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