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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호 - 고향엔 바람만 살더라시(詩)/시(詩) 2019. 6. 20. 13:00
가시내야 고향엔 바람만 살더라.
바람이 온 산을 황금빛으로 물들여 놓고 저만 싱싱 나돌아 다니더라.
향기롭던 탱자나무 울타리 속 홍옥도 죄다 도시로 팔려가고,
삭정이처럼 마른 감나무 가지에 홍시만 발갛게 발갛게 집 떠난 지아비 그리는 새댁의 볼처럼 붉더라.
젖가슴이 애기호박 같던 갑술이도 바람이 무시로 겁탈하여 할망구로 만들어 놓고,
본동댁 육촌 누이도 파란 하늘 푸른 도래솔 억새 숲에 눕혀 놓고 저만 히히 웃고 다니더라.
가시내야, 너랑 나랑 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왔더라도
느릅나무 붉게 물든 고샅길에서 산새 들새 합창하는 해거름 텅 빈 하늘만 만났을 게다.
키다리 미루나무 까치집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늦가을 햇살의 꼬락서니만 보았을 게다.
바람에 세월에 정기 다 빼앗기고 쭉정이 된 으악새의 휘파람 소리만 들었을 게다.
가시내야 산마을 고향엔 바람만 살더라.
산국화 들국화 능금밭 노란 탱자가 향기롭던 언덕에 바람이 세월을 메다꽂는 가쁜 숨소리만 들리더라.
(그림 : 안모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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