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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호 - 길에 대한 단상시(詩)/시(詩) 2019. 6. 6. 13:30
1
맨 처음 길을 간 사람은 길이 아닌 길을 간 것이다
나그네가 외로운 것은 길 때문이다
길은 근원적인 고독
같은 길을 둘이 갈 수는 없다
꿈이란 몸부림치며 한밤에 혼자 꾸는 것이다
그는 그 길로 되돌아왔을까
2
길이 막혔다는 말은 있어도 끝났다는 말은 없다
길이 막히면 길은 그 자리에 잠복한다
비 오는 날 유리창에 떨어진 빗물
머뭇거리지만 스스로
길을 만들며 흘러내린다
길 안에는 또 다른 길들이 내장되어 있다
3
반복되는 길은 길이 아니다
벽에 묶여 평생을 맴도는 시계도
한번 지난 시간은 결코 반복하지 않는다
몸통을 타 태우고서야 지구를 벗어난 우주선처럼
문을 나선 나에게는 길 뿐이었다
꿈이 길을 만들어내겠지만 때로, 길에 맡기고 가다 보면
어느 날 꿈꾸는 별을 만나게 되리라
나는 지금 내 길의 어디쯤 서 있는가
4
물길을 따라 거슬러 온 연어
생이 빠져나가고 본능만 남아 헐떡거린다
그에게 길은 무엇이었나
도착한 곳이 목적지 인지 묻지도 않고
헐거워진 몸뚱이를 털어 다음 생을 쏟아 낸다
목적지가 처음부터 길의 일부였다는 것을
연어는 알고 있었을까
(그림 : 이영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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