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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관 - 휘청거리는 오후시(詩)/전영관 2018. 3. 21. 22:22
구룡포에 비 온다
젖을까 두려워 양말 안으로 몸을 숨긴 바지들이 모여든다
몇몇은 비린내에 절었고 하나는 비늘을 바르고 왔다
구부리고 사느라 무릎 불거진 바지들이 원탁에 둘러 앉았다
홧김에 물을 먹었는지 허망하게 물이 샜는지
장화도 바닥에 하소연을 해댄다 질컥거린다
어판장서 당한 분풀이로 동댕이 쳐진 하나
집 나간 마누라 찾아달라는 생청 통에 얻어터진 하나
항구 모퉁이 선술집까지 흘러왔으면 볼 거 없다는 표정의 양은사발들이
원탁에 모여 서로를 외면한다
꾸덕꾸덕 바지는 마른다
불거진 무릎은 들어가지 않는다
입 벌린 장화는 제풀에 겉마른 척 주인을 기다린다
찌그러진 양은사발들만 연탄불을 건너다니고 빙빙돈다
망자는 없는데 눈치 모자라는 담배 연기가 향불 자세로 흔들린다
구룡포에 비 온다
거짓말 못 하는 유리창도 바깥을 얼비춘다
뼈만 남아서 더 늙을 것도 없는 기와 아래 무릎 불거진 바지들이 모여 술을 푼다 술이나 푼다
비 보다 먼저 젖고 비가 거쳐도 마르지 않는 축들이 술에 젖는다 술에라도 젖는다
어쩔 거냐고 구룡포에 비 온다
(그림 : 임재훈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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