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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죽은 듯이시(詩)/송진권 2017. 7. 14. 23:56
죽음에 비하다니 될 법이나 한 소리냐고 하지만
죽은 듯 자고 일어난 몸에 빗소리가 들려온 거라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 잔뜩 몸을 옹송그리며 귀를 모으고
조목조목 짚어가며 그 소릴 들었던 것인데
이거는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소리
이거는 못자리 논에 떨어지는 소리
또 이거는 막 패어나는 보리 까끄라기에 떨어지는 소리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들리는 소리들 틈으로
처마 물받이 홈통에 땅 패지 말라고 내놓은 양동이 속으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도 섞여 들려왔던 것인데
이 비가 어젯밤 늦게부터 왔는지 아침나절부터 왔는지
영 가뭇없는 거리 둥글게 퍼지는 소리들 틈에서
나는 죽었다 살아왔는지 자다가 깨어났는지도
영 모르겠는 거라
하룻밤새 하 여러 몸을 빌려 살다 왔으니
눈만 껌벅껌벅하며 멀리서 온 것들이
세상 것들과 만나 내는 이 소리를
죽은 듯이 엎드려 듣고만 있었던 거라
(그림 : 전성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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