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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진권 - 살구나무 당나귀
    시(詩)/송진권 2016. 10. 10. 21:45

     

    사실 살구나무라고 이렇게 허물어져가는 블록담 아래

    고삐매어 있는 게 좋은 건 아니었다

    푸르르릉 콧물 튕기며 사방 흙먼지 일구며 달려 나가고 싶었지만

    처마 밑까지 수북한 폐지나 마대자루 안의 유리병과 헌옷가지

    한 쪽 바퀴가 펑크 난 리어카와 시래기 타래를 비집고 나오는

    그 얼굴을 보면 차마 못할 짓이었다

     

    사실 살구나무도 조팝꽃 한 가지 머리에 꽂고

    갈기와 꼬리털 촘촘 땋고 그 끝마다 작은 방울을 단

    축제일의 반바지를 입은 당나귀들이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아침마다 앓는 소리와 기침소리를 듣는 게 신물 나기도 했지만

    작년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렇게 빨랫줄에 둥치 패이며 묶여 있지만

    벼르고 벼르던 그 당나귀처럼

    누런 달을 허공에 까마득히 뒷발로 차올리고

    푸르르 푸르르 이빨 들어내고 웃어버리고 싶었으나

    그냥 얌전히 묶인 채 늙어가며

    듬성듬성 털 빠지고 몽당한 꼬리나 휘휘 저으며

    늙은 주인의 하소연이나 들어주는 개살구나무로 주저앉아

    해마다 누런 개살구나 짜개지게 맺을 뿐이었다

     

    흐물흐물한 과육을 쪼개 우물거리다

    퉤 씨를 뱉는 우묵한 입이나 보며

    빨랫줄이나 팽팽히 당겨주는 것이다

    이래두 살구 저래두 살구지만

    몸빼와 월남치마 펄럭거리는 살구나무지만

    이 집이 올해도 이렇게 꽃으로 뒤발을 하고 서 있는 건

    늙은 당나귀 살구나무가 힘껏 이 집 담벼락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 신상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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