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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미 - 살아 있는 집
    시(詩)/김상미 2017. 5. 27. 11:54

     

     

    나는 아주 낡고 허름하고 오래된 집에 산다

    고장 난 수도꼭지를 갈면 배수구가 막히고

    배수구를 고치면 변기가 막히고

    변기를 뚫으면 이층 베란다에 고인 물이 천장으로 스며든다

    방 안 가득 쌓인 책은 버려도 버려도 다시 쌓이고

    창틀에 낀 먼지는 울부짖는 침묵처럼 나를 압도하며 비웃는다

    그러나 청춘이 훨씬 지난 나는 깔끔보다 허름에 더 익숙해져

    이제는 막히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들에 눈 하나 끔쩍하지 않는다

    무섭지가 않다

    가진 게 없는 자의 배짱과 오기로

    미래의 배고픔을 미리 배고파하고

    미래의 허름함을 미리 경험하는 것뿐

    절망도 익을 대로 익으면 뜨거운 김이 올라오고

    어떤 이에게는 훌륭한 음식이 되는 법이다

    그렇게 그대와 함께 즐겨 듣던 음악도 축배도 열정도

    이제는 가장 허름한 벽지에 다급하게 적어놓은 누군가의 저 전화번호처럼

    호소력 잃고 호기심 잃은 우울한 노파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상심 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어떻게 보느냐를 결정하듯이

    그대의 향기와 정념과 목소리는 이 집에 다 묻어 있다

    깨끗이 쓸자마자 다시 낙엽이 떨어져 쌓이는 저 가을날의 길처럼

    누구에게도 매수당하지 않아 생생히 살아 있는

    아주 낡고 허름하고 오래된 이 집에!

    (그림 : 이인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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