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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일근 - 쉰
    시(詩)/정일근 2016. 6. 8. 18:31

     

     

    그일 뿐, 내가 아닌 이야기

    어디론가 몹시 떠났다가

    이제 막 들어오는 사람

    검은 비닐봉지를 툭 던지며 불을 켜는 사람

    손바닥을 물끄러미 보다가

    얼굴을 훑는 사람

    빙하의 문을 열듯 냉장고를 열어보는 사람

    무언가를 우둑우둑 세차게 씹는 사람

    물을 마시고 소파에 등을 묻는 사람

    리모컨을 누르면 쏟아지는 그의 행적

    몇 만 원보다 몇 억이 필요한 사람

    생각마다 사건만 득실거리는 사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거짓말

    털면 털리는 죄

    머리끝까지 옷을 덮어쓴 두더지

    처음은 없고 상습만 가득한 사람

    CCTV에 뚝뚝 찍힌 허깨비

    넥타이보다 점퍼 점퍼보다 외투 외투보다 등산복

    충혈을 도사리고 가는 사람

    천수천안의 추행을 깊숙이 감춘 채

    7080 단골집 맥주 셋 마른안주 하나

    그 여자조차 살랑살랑 관심 없는

    그 이야기, 입만 열면 발설하고 싶은

    내가 아닌, 그의 이야기

    (그림 : 남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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