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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천 -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시(詩)/정윤천 2015. 6. 11. 11:40
마땅히 사랑이라면
한사코 뒷날의 아침을 예감해야 하는 일이었네
거기 그렇게 굳세게 푸르러 오는 수만 평의 대지 위에
아프게 뿌리 내리고, 쓰라리게 잎자리 튀워야 할
세월의 무늬 또한 아로새겨볼 일이었네
하여 사랑이라면 애써 지워보려고 눈을 감아도
어찌할 수 없는 상사(想思)의 시간은 저 먼저 와서
가슴으로는 그 사이
만산의 홍엽같은 속수무책의 물들어 버림이기도 할 일이었네
때로는, 넘어지고 일어나 그래도 가야만 될
막막한 밤길의 행로
소슬한 바람의 발자국 소리 곁에서도
마침내 뚝뚝 듣던 차디찬 빗소리 곁으로도
그러나 짐지기로 한 무거운 기약일 수 있겠네
사랑이라고 이름 지워준 이 화인(火印)의 노래는
지는 꽃잎의 서리 내린 계절에서도
폭염의 너울 깊은 지친 햇살 아래서도
반드시 그 하늘은 푸르르겠네
나는 아직 사랑의 시를 쓰지 못하였네
그러나 사랑이라면, 함께 견뎌 이룰 수 있는 마지막의 절정까지
그 길 위에 내몰린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행복한 형극의 먼 길 위에 나선
기꺼움이고야 말 일이었네.
(그림 : 이육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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