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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인수 - 앉아보소
    시(詩)/문인수 2015. 5. 2. 11:51

     

    - 거, 앉아보소.
    늙은 여자가 강물 물 가까이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망가진 채 엉거주춤 돌아온 사내더러 한 번 말했다.

    꺼질 듯 낮게 말했다.

     

    키가 껑충한 그래서 그런 건지 낯짝 안 보이는,

    아직도 허공에 매달려 떠돌고 있는 건지 낯짝 없는,

    낯짝 없는 사내더러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오랜 세월, 장터거리에서 혼자 국밥집을 해왔다.

    저녁노을 그 아래 시뻘겋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러나 쿨럭쿨럭 뒤엉키는 물,

    지금은 다만 긴 강.

    앉아보소. 이 말은 어린 시절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귀에 익었던 말이다. 그 청유에는 뭐가 그리 급할 게 있느냐, 좀 천천히 얘기를 해보자,는 속내가 숨어있다. 앉으소,가 아니라 앉아보소,가 되는 까닭은 그것이 무릎을 굽혀 앉은 신체적 동작일 뿐 아니라, 뭔가 심상찮은 일에 대한 긴장을 눅이려는 숨돌림이 포함되어 있다. 문인수는 이걸 읽어낸 것이다. 이 한 마디로도 한 살이의 강물이 대하소설로 흐른다. 문인수의 상상력은 전원일기의 한 장면처럼 질박한 자리에서 감동을 생산한다. 현실을 물어내는 생생함이다. 앉으소의 명령이 앉아보소의 청유로 되는 뉘앙스에는 명령을 받는 사람의 의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서려있다. 그러나 남자는 서있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버릴 듯 불안하다. 심수봉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라는 노래를 불렀을 때의 그 기조정서는 바로 이 유목적인 삶을 살아온 이 나라 사내들의 무책임에 대한 원망이다. 여자는 단지 말한다. 앉아보소. 나와 같이 살자고 그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앉아서 차근차근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한번 이야기나 해보자는 것이다. 여자는 털썩 먼저 주저앉았다. 하지만 여자는 오래 전에 사내가 훌쩍 떠나버렸을 때부터 이미 주저앉아 국밥집을 해온 것이다. 국밥의 붉은 국물의 이미지는 노을타는 긴 강과 고통으로 매운 시간을 겹으로 뒤세우고 있다. 낯짝 안보이는 사내는 부끄러워 하고 있는 중일까. 그래도 삶의 원점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준 여자에 대해 미안해하고 있는 중일까. 얼굴이 안보이는 것을 문인수는 면목없음에 잇고 있지만, 이수동은 관계의 낯짝인 페르소나를 잃어버린 사내의 허깨비같은 정체성을 표현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내는 얼굴이 없고, 또 말이 없다. 그저 허공에 매달려 떠돌았던 지난 삶처럼 아직도 허공에 덩그라니 떠있는 것이다. 앉아있는 여자의 눈으로 보면 말이다.
    앉아보소,에는 그 단 한 마디의 '발화'가 주는 무게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국밥집 여자의 평생을 건 꿈은 저 앉아보소에 묵직하게 매달린다. 이 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 이 시는 무엇을 꿈꾸는 중일까. 국밥집 여자가 떠나버린 한 남자에 대해 견지해온 마음의 결고움이, 이 퉁명스런 재회에서 툭 던져지는 저 한 마디에 배어나온 걸, 이수동이, 그리고 문인수의 감수성이 낚아챈 것이다. 한 삶을 건 순정의 무표정한 한 마디, 앉아보소. 그래서 이 시는 다시 읽어도 코끝이 찡해진다. 몸빼바지 내 어머니의 굳은 살 속에 숨은 기막힌 사랑이 한 찰나 전율한다. (이상국기자)

    (그림 : 송준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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