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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 오래된 그릇시(詩)/시(詩) 2014. 7. 17. 23:26
누가 깨우지도 않는데 자꾸 저절로 눈이 떠진다
창밖엔 눈이 오는지 희미하게 몰려오는 한기
두리번거리며 방안을 둘러본다
누런 벽지, 문짝이 떨어져 삐걱거리는 장롱, 땀냄새 나는 베개
어제까지의 일들을 고스란히 인수인계 하는
까닭모를 삶의 의지가 눈송이처럼 날아와 쌓이는 동안
나는 하나의 텅 빈 그릇을 생각한다
내가 누운 셋방, 얇은 여름 이불, 잠옷이랄 것도 없는 추리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껴입은 사람 형상의 몸
나는 이런 것들의 그릇에 담겨
공중을 헤매다 온 눈송이 같은 내 혼백의 깃털이
아주 조금 따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머리맡 물그릇은 차갑게 식어있고
저온으로 맞춘 보일러가 돌 듯 심장이 뛰는 소리
할머니가 새벽 군불을 지피면
굴뚝을 타고 파랗게 하늘에 스며들던 연기처럼
흩어지는 입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면
내가 흘려놓은 잠꼬대, 무감각하게 몸속을 흘러다니던 사소한 꿈들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오늘의 근심들을
체온으로 살살 녹여가며 나는 한숨을 쉰다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고
지상의 우묵한 그릇에 쌓여오는 하루의 시간들
식탁엔 어제 먹다 만 저녁 찬과 밥이 식어 있고
마흔이 되면서 문득 늙어버린 내 손을 가만히 쓰다듬어보면
밥그릇에 걸쳐진 오래된 수저 한 벌 같다
내 첫 생일상에 밥과 국을 따뜻하게 올려놓고선
너는 커서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여운 눈으로 나를 그렁그렁 바라보았을 아버지가 생각난다
이 텅 빈 새벽에
만물은 각각 그 오래고 낡은 제 그릇에 담긴 채
길고 긴 겨울밤을 나고 있다
마당에 있는 찌그러진 개 밥그릇에도 조용히 눈은 내리고(그림 : 이인실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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