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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능소화 편지시(詩)/허영숙 2014. 2. 27. 11:51
꿈결인가, 그대를 만난 것이
단 한 번 본 것뿐인데
허락도 없이 들어앉은 그대를 쫓아
일생을 소진하며 여기까지 왔다
잠깐 스치고 오래 헤어져 있었으니
그리운 문장들만 넝쿨을 이루고 자라
담벼락이 환하다
그대 발소리는 멀고
그 소리 담으려 나를 더 크게 열어
한 잎 귀 넓은 꽃으로 핀다
한여름 땡볕을 딛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이 지독한 흡착은
그대가 일생에 또 한 번 이 길을 지나 갈 때
꽃 무더기에 숨은 나를
모르고 스쳐갈까하는 염려 때문이다
먹구름을 밀며 하늘이 뒤로 숨고
그대와 나의 먼 행간에도 빗방울이 든다
간당간당한 꽃대를 아프게 움켜쥔다
이토록 간곡하고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뼛속까지 훑고가는 소나기가 내리기전에내가 먼저 나를 놓아버릴 것이다
(그림 : 김기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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