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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숙 - 눈발 경문(經文)시(詩)/허영숙 2014. 2. 27. 11:45
겨울 운문사에 은행나무
빈 가지의 정적을 보러갔다가 나오는데
오후 내내 내린 눈으로
외곽마저 지워진 길을 새로 열며 어린 여승
작은 바랑에 눈을 가득지고 걷는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앳된 나이
순백의 그늘이 환하다
어쩌다 여기에 와서 내렸나
걸음 시주라도 하려는 듯
뒷좌석을 공손히 내밀었더니
걸음을 물리며 합장한다
내가 내고 가야 할 눈길의 안녕을 빈다
바퀴자국 위에
느린 걸음이 내는 묵언의 수행이 쌓인다
하늘에서 땅으로 환속하는 눈발들이
차 위에 두텁게 내려앉는다
소식조차 아득해진
젊은 날 출가한 친구 얼굴이
소복하게 쌓인다(그림 : 조홍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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