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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시(詩)/조용미 2014. 1. 17. 20:12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에 닿으려면
간조의 뻘에 폐선처럼 얹혀 있는 목선들과
살 속까지 내려꽂히며 몸을 쿡쿡 찌르는 법성포의 햇살을 뚫고
봄눈이 눈앞을 가로막으며 휘몰아치는 저수지 근처를 돌아야 한다
무엇보다 오랜 기다림과 설레임이 필요하다
적막이라는 이름의 나무도 있다
시월 지나 꽃이 피고 이듬해 시월에야 붉은 열매가 익는 참식나무의 북방 한계선,
내게 한 번도 꽃을 보여준 적 없는 잎이 뾰족한 이 나무는
적막의 힘으로 한 해 동안 열매를 만들어낸다
적막은 단청을 먹고 자랐다
뼈만 남은 대웅전 어칸의 꽃문을 오래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내 적막이 몸 뚫고 숨 막으며 들어서는 것을 알 수 있다
적막은 참식나무보다 저수지보다 더 오래된 이곳의 주인이다
햇살은 적막에 불타오르며 소슬금강저만 화인처럼 까맣게 드러나는
꽃살문 안쪽으로 나를 떠민다
이 적막을 통과하고 나면 꽃과 열매를 함께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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