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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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옥 - 시간의 강물에 그물을 담갔네시(詩)/시(詩) 2023. 6. 29. 06:58
강둑에 앉아 반나절 시간의 강물에 그물을 담갔네 발끝에 묻어온 아집 풀밭에 비비고 도심에 가득한 질투 그걸 마시고 공기로 마셔 내일쯤은 난쟁잇과의 꽃이 되어 씨 날리며 뻗어오를 것을 감지하네 어제의 답답했던 일 걸러내며 그저 강물만 보내면서 보내면서 며칠 전의 몇 해 전의 누군가가 답습했을 마음 날리고 단지 정물이 되어 바라보는 모든 것은 부시게 아름다워 아름다운 그 눈으로 일어서서 도심으로 더러운 도심으로 돌아가 한번 더 아름답게 바라볼 것이네 (그림 : 이윤경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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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 오늘 하루시(詩)/시(詩) 2023. 6. 25. 08:30
어두운 하늘을 보며 저녁 버스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이것저것 짧은 지식들은 많이 접하였지만 그것으로 생각은 깊어지지 않았고 책 한권 며칠씩 손에서 놓지 않고 깊이 묻혀 읽지 못한 나날이 너무도 오래 되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지냈지만 만나서 오래 기쁜 사람보다는 실망한 사람이 많았다 ---나는 또 내가 만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실망시켰을 것인가 미워하는 마음은 많았으나 사랑하는 마음은 갈수록 작아지고 분노하는 말들은 많았지만 이해하는 말들은 줄어들었다 소중히 여겨야 할 가까운 사람들을 오히려 미워하며 모르게 거칠어지는 내 언어만큼 거칠어져 있는 마음이 골목을 돌아설 때마다 덜컹거렸다 단 하루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서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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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 쓸 만하다고 생각해서 쓴 연애편지시(詩)/김용택 2023. 6. 25. 08:22
창문을 열어놓고 방에 누워 있습니다 바람이 손등을 지나갑니다 이 바람이 지금 봄바람 맞지요? 라고 문자를 보낼 사람이 생겨서 좋습니다 당신에게 줄 이 바람이 어딘가에 있었다는 게 이상하지요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다고들 하는데 이 말이 그 말 맞네요 차를 타고 가다 어느 마을에 살구꽃이 피어 있으면 차에서 내려 살구꽃을 바라보다 가게요 산 위에는 아직 별이 지지 않았습니다 이맘때 나는 저 별을 보며 신을 신는답니다 당신에게도 이 바람이 손에 닿겠지요 오늘이나 내일 아니면 다음 토요일 만나면 당신 손이 내 손을 잡으며 이 바람이 그 바람 맞네요, 하며 날 보고 웃겠지요 (그림 : 설종보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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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옥 - 유월 유채꽃시(詩)/시(詩) 2023. 6. 23. 16:34
유월 엎지러진 유채꿀을 핥으며 나는 유채꽃이 되었다 꽃은 바람이 새찰 때 내게 누운 꽃 쓰러진 꽃 무더기 꽃으로 있다가 바림이 없을 때 꽃으로 남는다 나는 유채꽃이면서 늘 유채꽃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사람은 꽃만 열심히 보고 꽃과 꿀을 말한다 어제의 꽃은 오늘의 꽃이 아니듯 멀리서 보는 꽃은 한결같아 몇 송이 꺾으려 허리 굽히면 꽃들은 무수히 흔들리고 제각기 흔들며 나는 그런 유채꽃이며 비 멈추고 있는 물 멈추고 있는 물 아니면 스치는 모든 꽃 그 어느 것과 나는 호흡이 같아 그들과 나는 한 부분 (그림 : 강정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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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미 - 사랑을 위한 비유법시(詩)/시(詩) 2023. 6. 23. 16:01
삼 년 묶은 김치로 자작자작 끓여낸 찌개처럼 너는 다가왔다 한쪽 다리가 부러져 버려진 나무의자처럼 나는 너에게 기댔다 폐업한 후 방치된 폐건물처럼 너는 멀어졌다 정전으로 멈춘 엘리베이터 안에 날마다 갇힌 것처럼 두려웠다 온몸 피멍 뚫고 바위틈속에서 피어오르는 민들레 꽃처럼 나는 무게에 짓눌려 어깨가 아팠다 동이 틀 때 종탑 위 십자가의 떨림처럼 재회는 오지 않았다 오크통에서 십 년 동안 숙성된 와인처럼 내밀하게 나는 침묵했다 공기처럼 후일담은 허다했고, 일기예보처럼 예감은 빗나갔다 태양빛 비껴 새벽 달빛은 슬프게 기울고 새들은 나무위에서 새 봄을 알리지 않는다 담장 밑 수선화처럼 반쯤 고개든 채, 나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처럼 온기를 자주 버렸다 은밀한 까마귀처럼 누군가 다가와 속삭였다 다시 돌아오면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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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 - 능소화시(詩)/시(詩) 2023. 6. 19. 13:18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담을 넘었다 그녀는 담 넘어 온 나를 보고 큰소리로 웃으며 쪽문을 가리켰다 담을 넘은 용기는 간 데 없고 그녀가 가리키는 쪽문으로 도망 나왔다 그럴 거면 왜 담을 넘었느냐며 친구들이 놀려댔다 그 이후 아무리 낮은 담이라도 쳐다보지 않았다 담을 넘어 골목으로 흘러나오는 맑은 웃음소리가 젖은 이마를 씻겨주는 저녁 아주 오래 전 내가 넘었던 담벼락에 핀 예쁜 꽃이 보였다 나를 만나고 싶다면 저 문으로 들어오라고 쪽문을 가리켰던 긴 손가락이 오랜 미련을 흔드는 저녁이었다 (그림 : 예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