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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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환 - 건들거리네시(詩)/시(詩) 2023. 7. 31. 15:02
범생이가 건들거리며 땅끝마을 바닷가를 거닐고 있네 바람도 없는데 파도도 조용한데 아직 못 해 본 일 많은데 범생이는 건들거리네 벙거지 눌러쓰고 반바지에 슬리퍼 끌고 제멋대로 건들거려보네 막힌 데 앞에서 돌아갔고 허물지 못하고 비켜 갔던 범생이의 한 생은 후회가 많아 제 몸 하나 건들거려보는 일에도 흥이 솟네 평생 못 안아본 사람 안아보고 싶기도 하고 평생 못 만져본 고래 . 만져보고 싶기도 하지만 부질없고, 헛되고, 망령스러워 다 잊어버리기로 하네 잊어버리고 그냥 건들거리기만 하기로 하네 (그림 : 허용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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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뒷모습시(詩)/정호승 2023. 7. 26. 23:25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답다고 이제는 내 뒷모습이 아름다워졌으리라 뒤돌아보았으나 내 뒷모습은 이미 벽이 되어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높은 시멘트 담벼락 금이 가고 구멍이 나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제주 푸른 바닷가 돌담이나 예천 금당실마을 고샅길 돌담은 되지 못하고 개나 사람이나 오줌을 누고 가는 으슥한 골목길 담쟁이조차 자라다 죽은 낙서투성이 담벼락 폭우에 와르르 무너진다 순간 누군가 담벼락에 그려놓은 작은 새 한마리 포르르 날개를 펼치고 골목 끝 푸른 하늘로 날아간다 나는 내 뒷모습에 가끔 새가 날아왔다고 맑은 새똥을 누고 갈 때가 있었다고 내 뒷모습이 아름다울 때도 있었다고 (그림 : 김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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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 능소화시(詩)/시(詩) 2023. 7. 26. 23:16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눈동자를 뚫고 나왔다 마른 가지를 내밀었다 돌의 박물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진안 마이산에서 본 돌덩이를 파고 들어간 바로 그 능소화 모든 것이 조용히 지나가주지 않는 날들이다 칠월에 꽃 피는 거 보러 가겠다고 엉덩이를 털며 돌아와 깜빡 잊고 살았다 한 해가 지나버렸다 칠월에 능소화가 피었다가 졌겠지 아마, 그날 두고 온 으깨진 시간들이 내 몸에 남아 있었나 보네 잠을 잤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눈알이 빨개졌다 독을 먹은 꽃이었고 울음이었다 습(濕)의 시절이 다시 돌아온 걸까 마디마디 메마르지 않고 잎들도 꽃들도 무성하라고 눈물이 흐른다 흘러준다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당신이 잊지 않기를 (그림 : 김희남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