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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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향 - 장미는 제 이름을 오월 속에 숨겨 두고시(詩)/시(詩) 2023. 5. 26. 09:41
지나간 사고는 면회 금지입니다 문밖에서 서성거리는데 끝을 알만할 때 모퉁이 팻말 사라집니다 돌아가세요 제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옮겨 간 오월 장미, 창백한 주름 서로의 가시 끝에서만 숨어 사는 아프다는 말은 모퉁이조차 잃어버리고 순서를 정하는 건 다시 지금부터, 여기서부터 오늘의 가시만이 우리는 진심입니다 집에 가겠다고 집 밖으로 나가려는 장미 넝쿨은 내일은 몇 번째 사고가 되고 싶은지 열한 번째 변심하는 오월을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끝내 서두를 일이 하나도 없는 재채기와 같은 오월 속에서 철 지난 장미 차례는 지켜줘요, 아직입니다 (그림 : 박상덕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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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 대부분 사람이고 가끔시(詩)/시(詩) 2023. 5. 26. 09:37
대체로 더럽고 가끔 깨끗합니다. 인내심이 좋은 편이고 무던한 성격이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견디다 못해 청소할 때가 있고 그때는 또 귀찮지 않고 즐겁습니다만 더러움을 평범함으로 이해하면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합니다. 타인의 더러움에도 마찬가지의 관대함을 가지려 합니다. 물론 견디기 힘든 정도라는 것도 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를 상상하면 왜 늘 빈 깡통 소리가 들리는 걸까요? 요란한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니라 요란한 소리를 내는 사람을 상상하면서 더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늘 상대적인 면이 있으니까요. 인간에 대해서라면 실망스럽다기보다는 실망하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비관합니다만 그래도 가끔은 즐겁고 싶습니다. 어두운 마음, 불 꺼진 마음에서 본성을 찾고 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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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하 - 사랑을 지키다시(詩)/시(詩) 2023. 5. 26. 09:26
수박을 들고 커다랗고 짙은 수박을 들고 붉은 물이 가득 든 초록 수박을 들고 삶보다 무거운 수박을 들고 땡볕 아래 걸었네 오래 걸었네 뜨거운 길을 걸었네 짙고 푸른 껍질을 쪼개면 시원할까 그 붉은 물은 달고 시원할까 멀고 먼 수박 껍질 속의 세계를 향해 걸었네 던져버릴 수 없어 떨어뜨릴 수도 없어 둥글고 커다란 수박은 깨져버릴 테니까 짙고 푸르지만 수박의 껍질은 연약하고 내 팔은 가늘고 등은 굽었다 터벅터벅 걸었네 멀고 먼 길 끝이 기억나지 않는 노란 길을 달콤하고 붉고 무거운 그대와 아!가겠소 난 가겠소 저 언덕 위로 목이 마르지 않았네 눈물이 흘렀네 멀고 먼 지워지고 말 꿈에서 (그림 : 장정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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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명 - 잡초야 잡초야 막걸리 한잔 받아라시(詩)/시(詩) 2023. 5. 22. 14:43
잡초가 눈만 뜨면 한 뼘씩 커져 있다 불쑥 자랐어도 행색이 초라하다 그래도 지칠 줄 모르는 잡초의 넉살 잡초야, 너는 언제 한 번이라도 주인공이 되어 봤니 괜찮아 괜찮아 나도 맨날 구박덩어리야 잡초야 잡초야 막걸리 한 잔 받아라 너는 취하지도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이구나 떨어지는 공이 바닥을 쳐야 오르겠지 내가 지금 바닥이야 다음날 아침, 잡초가 막걸리 한잔에 불쑥 자랐어도 행색이 초라하다 그래도 지칠 줄 모르는 잡초의 끈기 너를 보며 내가 다시 일어선다 아무리 내 앞길을 막아도 봄날은 오겠지 잡초야 잡초야 막걸리 한 잔 받아라 고맙다 고맙다 너를 보며 내가 산다 (그림 : 김영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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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 - 제비는 온다시(詩)/시(詩) 2023. 5. 22. 14:13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에 제비는 둥지를 짓지 않는다 긴 막대기로 제비집 부수기 시합을 하는 미운 일곱 살 아이들 재재거리며 뛰논다 해도 사람들의 웃음, 봄꽃처럼 살랑이는 그런 마을 처마에 제비는 검은 연미복을 입은 제비는 먼바다를 건너와 집을 짓는다 사람이 사람을 귀히 여기고 사람의 향기에 사람이 아름답게 취하는 그런 곳에 제비도 집을 짓고 싶은 것이다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의 주인인 사람들과 더불어, 검은 연미복의 제비도 한바탕 삶의 잔치를 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보라, 지금 빈 마을 밖에서 들끓는고 있는 저 인간들의 온갖 악취를 제비가 살지 않는 빈집을은 알리라 폐허의 세상을 만든 건 오직 인간들의 발길이었다 새들이 떨어지고 물고기는 떠오른다 그 옛날 검은 연미복의 제비가 생각했던 삶의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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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권 - 소나기 지나가시고시(詩)/송진권 2023. 5. 16. 11:09
그렇지 마음도 이럴 때가 있어야 하는 거라 소나기 한줄금 지나가시고 삽 한자루 둘러메고 물꼬 보러 나가듯이 백로 듬성듬성 앉은 논에 나가 물꼬 트듯이 요렇게 툭 터놓을 때가 있어야 하는 거라 물꼬를 타놓아 개구리밥 섞여 흐르는 논물같이 아랫배미로 흘러야지 속에 켜켜이 쟁이고 살다보면 자꾸 벌레나 끼고 썩기나 하지 툭 타놓아서 보기 좋고 물소리도 듣기 좋게 윗배미 지나 아랫배미로 논물이 흘러 내려가듯이 요렇게 툭 타놓을 때도 있어야 하는 거라 (그림 : 심수환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