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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투산이 마을에는 아직도 저녁연기가 따습다 둠벙을 푸면 살찐 추어가 한 망태기 아이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당산나무는 당당히 마을을 지키고 “네 이 녀석들 멧돼지들아 논밭을 갈지도 씨 뿌리지도 않은 네가 곡식을 축내다니…” 쩌렁쩌렁 울리는 늙은 음성이 아직도 우렁차다. (그림 : 김주형 화백)
가을 뜨락에 씨앗을 받으려니 두 손이 송구하다 모진 비바람에 부대끼며 머언 세월을 살아오신 반백斑白의 어머니, 가을 초목이여 나는 바쁘게 바쁘게 거리를 헤매고도 아무 얻은 것 없이 꺼멓게 때만 묻어 돌아왔는데 저리 알차고 여문 황금빛 생명(生命)을 당신은 마련하셨네 가을 뜨락에 젊음이 역사한 씨앗을 받으려니 도무지 두 손이 염치없다. (그림 : 손선심 화백)
가을에는 씨앗만 남는다 달콤하고 물 많은 살은 탐식하는 입속에 녹고 단단한 씨앗만 남는다 화사한 거짓 웃음 거짓말 거짓 사랑은 썩고 가을에는 까맣게 익은 고독한 혼의 씨앗만 남는다. (그림 : 김명임 화백)
이 맑은 가을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담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그림 : 오치균 화백)
저물녘이면 그대 생각 깃으로 돌아오는 새처럼..... 저물녘이면 호젓한 외로움 말뚝에 몸 부비는 바람처럼..... 저물녘이면 그리운 마음 빈 마당에 고이는 달빛처럼..... (그림 : 장용길 화백)
눈부셔라 가을산 뜨거워라 가을산 저 진홍빛 입맞춤을 위하여 타오르는 불의 포옹을 위하여 숨가쁘게 숨이 가쁘게 가을은 봄부터 달려오고 있었구나. (그림 : 장용길 화백)
아픈 손이 아픈 손끼리 마주잡는다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끼리 순히 겹친다 아픈 손이 아픈 손 곁에서 쉬고 아픈 마음이 아픈 마음 곁에서 낫는다 참말로 아픈 손 아픈 마음은 그래서 안 아픈 손이 되고 또 안 아픈 마음이 된다. (그림 : 장문자 화백)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어머님은 가르쳐 주셨지만요 길 아닌 길 너무나 많이 헤매어 왔습니다 말이 아니면 갚지 말라고 어머님은 늘 타이르셨지만요 시시비비 여러 곡절 수없이 따졌습니다 지난 일은 잊으라고 어머님은 또 말씀하셨지만요 이순이 넘은 잠 안 오는 밤 피처럼 붉게 붉게 지난 삶이 떠오릅니다 (그림 : 장용길 화백)